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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걷는 길, 같이 걷는 길 

지리산둘레길을 시작할 때는 가족과 함께 걸었다. 그러다가 친구들과 걸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혼자 걸었다. 홀로 여행을 다녀온 게 언제였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 20대의 젊은 날 혼자 지리산 종주를 했던 게 기억난다. 아, 물론 1박 없는 홀로 여행은 종종 다니곤 했다. 직업도 어딜 돌아다니는 일이 없이 붙박이 사무 업무만 하는 거라 출장도 드물다. 사정이 이러니 1박 이상의 여행을 혼자 떠난다는 것이 무척 낯설다. 설레거나 두려움도 무뎌질 나이가 되고 있다. 허나 나이가 얼마든 여행은 언제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건 사실이다. 

혼자 길을 걷는다는 것은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어 좋다. 늘상 관계 안에서 긴장하고 주위 사람을 살피면서 때로는 눈치를 받거나 반대로 눈치를 주는 일은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하루 이상 사람을 만나는 일이 거의 없는 숲 속에서, 남의 눈치 없이 오로지 내 몸만 살피면서 걸었다. 내 숨소리에 한참동안 귀기울이고 무섭게 뜀박질하는 심장 소리도 무심히 흘려듣지 않았다. 단단해지다 못해 굳어지는 무릎과 종아리 근육의 느낌, 돌과 돌 사이를 건너면서 살짝 비틀리는 발목도, 내리막길에서 온몸의 하중을 견뎌내는 발가락들이 아프다고 지르는 비명도 들었다. 산길을 걸을 때면 언제나 느끼던 감각이지만, 이번에는 더욱 가깝게 느껴 보았다. 온전히 내 안으로 들어가는 여행이었던 것이다. 

 

위태 마을 벗어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숲길로 이어진다. 봄의 기운이 무르익어 가면서 남도의 숲이 깨어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쉬고 싶은 곳에서 쉬고, 걷고 싶은 데서 걷고, 머물고 싶은 곳에서 머문다. 여럿이 가다 보면 멈추거나 쉬거나 걷는 것을 함께 결정해야 하지만, 혼자 가는 길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이또한 자유로운 일이니, 이것 때문에 혼자 여행을 가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쉬고 싶은 곳에서 한참을 쉬기도 하고, 머문 곳에서 만나 낯선 여행객들과 스스럼 없이 대화도 나누고, 마을에서 마주치는 노인들과 인사를 나눈다. 대부분의 인사말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 어데셔 오셨소?"다. 그렇게 말문을 트는 어르신들을 보면 괜히 마음이 따뜻해진다. 홀로 걷는 건 무심히 던지는 안부로도 푸근해지는 넉넉함이 생기는 걸까?   

혼자 걷는 게 함께 걷는 것보다 좋다는 것은 아니다. 혼자든 함께든, 길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함께 둘레길을 걸었던 친구나 가족들은 나에게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좋은 추억을 쌓고, 함께한 기억을 남기며, 오랫동안 서로의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시간도 소중하다.  그럼에도 홀로 걷는 길도 소중하다. 걸으면서 몸을 덜어내 듯이 걸으면서 생각도 덜어내는 데는 혼자 가는 여행보다 좋은 게 있을까? 결론적으로 함께 가는 여행은 쌓는 여행이지만, 혼자 가는 여행은 덜어내는 여행이 된다.

산죽들이 길 옆에서 여행객을 맞아준다. 이른 아침의 맑고 투명한 공기가 허파를 채워 준다.


자연의 회복과 내면의 평화

혼자만의 여행에서는 멍한 시간이 많이 생긴다. 차를 가져가지 않은 이유는 당연히 비용을 아끼는 게 가장 컸지만 그냥 버스 안에서 멍때리며 창밖을 보고 싶다는 이유도 컸다. 사실 운전을 즐기는 성격도 아니니 운전이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장거리 이동 중에는 그냥 버스 안에서 멍하니 창밖을 구경하거나 책을 보거나 편하게 낮잠을 자는 걸 즐기고 싶었다. 바람대로 됐다. 

진주시외버스터미널. 진주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지리산 천왕봉으로 가려는 외지 등산객이라면 이곳을 거쳐 간다.

 

오랫동안 계획을 세우면서 고속버스 - 시외버스 - 농촌버스의 연계 시간을 철저히 조사했다. 가장 어려운 건 농촌버스의 행선지 표시와 시간대 맞추기다. 일단 농촌버스는 보통 하루에 4회 정도 운행한다. 이마저도 특정 구간은 운행 수가 더 적다. 진주시에서 하동군 옥종면으로 시외버스를 타고 다시 옥종면에서 위태마을까지 농촌버스로 이동한다는 계획이었다. 굳이 금요일 오후에 진주로 내려간 이유도 토요일 새벽 옥종면행 첫차(보통 오전 6시~7시 사이)를 타기 위해서다. 내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6시20분에 첫 차가 있었는데, 실제 진주터미널에서 도착해 알아보니 7시 20분이 첫차다. 이렇게 되면 옥종면에서 8시에 출발하는 위태마을 가는 농촌버스를 놓칠 것 같다고 생각했고, 불길한 예감은 맞았다. 8시 버스 다음은 오후 1시에 있다. 아무리 기다림의 여행이라지만 5시간을 시골읍에서 보내긴 좀 그렇다. 결국 버스정류장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올라탔다. 이곳의 택시들에게 둘레길 손님은 흔하다. 타자마자 내 행색을 본 기사 아저씨는 “둘레길 가시오?”라고 묻는다. 위태마을로 데려다 달라고 하니 잘 알고 있다는 듯 더이상의 말없이 바로 출발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 

꼬불꼬불 난 길을 택시는 거침없이 달린다. 옥종면에서 출발한 택시는 지리산 산골짜기 마을을 향해 달린다. 위태마을에서 이날의 여정을 시작했다. 막상 혼자 걸으려니 뭔가 심심하다. 그래도 해 왔던 게 있으니 카메라도 준비하고 신발끈도 다시 맨다. GPS 지도도 다운받아 앱에 연결했다. 둘레길은 안내하는 표지판도 잘 되어 있고, 길 안내 매듭들이 나무에 걸려 있어 길을 놓치는 일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종종 길을 벗어날 때가 있고, 한참이나 안내하는 표지를 찾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럴 때 앱으로 깔아놓은 지도는 유용하다. 

지리산둘레길 10구간 위태-하동호 코스 지도

 

지리산둘레길 11구간 하동호-삼화실 코스 지도

 

90년대 초반에 지리산을 다닐 때에도, 2000년대에 백두대간 일부를 혼자 걸을 때에도 종이 지도는 필수였다. 시중에서 파는 등산지도를 비닐로 싸아서 눈비에 젖지 않게 하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자주 꺼내보고는 했다. 지금은 종이 지도가 필요 없다. 조그마한 액정 화면에서도 얼마든지 확대 축소가 가능한 지도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자주 꺼내 보다 보면 배터리가 금방 소진된다. 결국 배터리를 하나 더 챙겨야 했다. 하지만 핸드폰은 지도만 보는 용도가 아니다. 사진도 찍고, 영상도 찍고, 이걸 또 SNS에 올린다. 문자나 카톡이 오기도 하고 급한 전화가 올 때도 있다. 지도 앱을 계속 실행시키니 1회용 보조 배터리로도 어림없다. 결국 괴물 배터리를 하나 구했는데, 이 무게가 가방 하나 만큼이나 무겁다. 생각해 보면 그냥 종이 한장 들고 다니는 게 더 나은 게 아닐까 싶다. 결국 내 어깨와 무릎은 더 많은 무게를 견뎌내야 했으니 말이다. 아이러니다. 

세상은 참 이상하게 변한 거다. 전기와 전자 장비가 내 생활 반경을 확대해 주었지만 최첨단과는 동떨어진 깊은 숲속을 걷겠다고 나서면서도 주렁주렁 매달린 전기 전자 장비가 내 몸을 상하게 한다. 다시 돌아와 컴퓨터로 글을 쓰면서도 이런 생각의 꼬리가 꼬리를 물고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내 여행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걸까?

인류의 욕망은 이상 기후를 가져오면서 지구 곳곳에서 홍수와 가뭄을 일으키고 있다. 재난은 최부국 미국에도, 최빈국 스리랑카에도 찾아왔다. 하지만 그 후유증은 두 나라의 빈부격차만큼이나 다르다. 빈부 격차만큼이나 지금의 기후 이변은 인류가 처한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가장 큰 위협 중 하나다. 교황청도 인류 중심주의에 빠져 있던 교회의 과거를 반성하고 지구 환경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인류가 변화해야 하며 당장 성장 중심의 경제 정책 등을 멈춰야 한다고 한다고 호소했다. 

 

“자연에 대한 관심, 빈자들을 위한 정의, 사회에 대한 헌신과 내적 평화 간의 결합은 결코 분리할 수 없다.” - <찬미받으소서> (프란체스코 교황)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자연에 대한 관심 보다는 도시 문화의 욕망에 사로 잡혀 있고, 빈자들을 위한 정의가 아닌 부자들을 위한 공정을 외치고 있으며, 사회에 대한 헌신보다는 개인의 이기적 처신을 우선한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우리의 내적 평화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 인류의 그러한 모습에 대한 교회의 통렬한 반성이 저 문장으로 탄생했다.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느림을 생각했다. 서두르지 않고, 기다리고, 천천히 걷는 여행이었다. 그러면서 코로나로 잊혀진 ‘일상을 회복’하는 길도 너무 빨리 오지 않기를 바란다. 일상을 회복하자고 하는데, 그 ‘일상’이 어떠했던가? 너무 불필요한 만남이 많지는 않았는지, 너무 열심히 소비했던 건 아닌지, 허상에 사로잡혀 물건을 사들인 건 아니었나 생각했다. ‘보복 소비’라는 말이 왜 떠돌고 있을까? 이 단어가 무섭다. 어떻게든 돈을 쓰게 만들어 자원을 낭비하게 만드는 말이다. 이게 미덕일까? 이게 선행일까? 한번 더 생각해 보면 저 말이 가진 무자비함을 느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일상의 회복보다 더 중요한 자연과 내면의 평화는 언제쯤 회복을 맞이하고 치유될 수 있는 것일까?

 

하동의 대나무숲. 빛이 새어들 틈도 작아 땅에서는 다른 풀들이 자라기 힘들다. 바람이 불면 이파리들이 부딪는 소리가 스산하다.

 

하동호 주변 산책로.
하동호
10~11구간 시종점




우연으로 엮인 길 

첫 번째 우연. 60대 노부부와 같이 걸었다. 11구간을 걷고 있을 때였다. 여성분이 먼저 길을 물어왔다. 이 분들도 지리산 둘레길은 초행길이었다. 나 역시 초행길이라 자신하긴 어려웠지만 지도 어플로 확인해 길을 안내해 드렸다. 두 분이 내 앞에서 길을 나섰다. 이내 쫓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앞서 10구간을 다 걷고 11구간을 걷던 터라 힘이 부쳤다. 두 노인은 지친 내가 쫓아가기 어려울 정도로 잘 걸으셨다. 그래도 부지런히 가다 보면 정자 아래에서 쉬거나 쉼터 의자에 앉아 쉬고 있는 두 분과 다시 만난다. 자꾸 만나니 말도 섞게 되고, 인생과 여행 이야기를 나눈다. 펼쳐 놓은 간식거리를 서로 권하고 사양하고를 하다 보니 녹초가 된 몸이지만 마음이 따뜻해진다.  

  • 코로나라서 음식 나누는 것도 함부로 못하네요.
  • 괜찮습니다, 어르신. 저도 이것저것 챙겨왔어요.
  • 아내와 함께 해파랑길을 다 걷고 지리산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어요. 이 길도 참 좋네요.
  • 대단하십니다. 저도 아내와 함께 걸었는데, 아내가 관절이 좋지 않아 더이상 걷지 못해요. 그래서 이렇게 혼자 다닙니다. 
  • 아휴, 젊은 나이일텐데, 이렇게 좋은 구경을 못하는 것도 그렇고···· 아쉽겠네요.
  • 네, 많이 속상하네요. 저도 아내 두고 혼자 이렇게 오는 게 좀 미안하기도 하고요. 

 

해파랑길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도보 여행이 주는 즐거움, 인생의 황혼기를 함께 하는 부부의 이야기는 한없이 부러웠다. 건강과 부는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 둘 중에 어떤 것이 더 가치있을까? 둘다 있다면 더 없이 행복하겠지만, 그런 행운은 극소수만이 누릴 것이다. 이미 내 삶은 부와는 닿을 수 없는 거리에 떨어져 있다. 그저 건강한 몸으로 계속 이런 소소한 도보 여행을 계속 즐길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게 노부부는 나보다 저만치 앞서서 계속 나아갔다. 어린(?) 나는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뒷모습만 쫓아 갔다. 11구간의 끝 삼화실에서 다시 또 만나고 헤어졌다. 언젠가 길 위에서 다시 두 분을 만날 날이 있을까? 11구간을 마치고 한숨 돌렸다. 한꺼번에 두 구간을 걸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여정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도상으로 22km를 걸었더니 온몸이 비명을 지른다. 중간에 하루를 묵을 계획이었지만, 목적지까지 완주했으니 바로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삼화실에서 택시를 부를까 했는데, 마침 들어오는 택시가 있어 잡아타고 하동시외버스터미널로 부탁했다. 

 그런데 기사분의 택시 내부가 익숙했다. 인연의 씨줄과 날줄이 다시 엮였다. 아침에 옥종면에서 위태마을까지 태워 준 그 기사분이었다. 

"원래 삼화실에서 하동시외버스터미널은 제 택시가 다녀서는 안되요. 여기 시골 택시들도 다 자기 구간이 있어서 가급적 지켜야 하는 거죠. 그런데 어쩌다 보니 손님을 태웠는데, 이게 또 참 신기한 일이네요."
"그러게요. 저도 콜택시를 부르려던 참에 마을로 들어오는 택시 보고 잡은 건데···· 이런 우연도 있네요."

하동이 작은 고장이라고 해도 면적으로 보면 그렇게 작은 곳이 아니다. 이곳에도 12개 면이 걸쳐 있는 곳이라 작은 곳도 아니고 강과 산이 뒤엉켜 있어 길도 얽히고 섥힌 곳이다. 우연의 실은 그 얽히고 섥힌 곳에서도 엮어 주는 힘이 있는 것일까? 

11구간.

 

 세상에는 많은 우연이 있다. 대부분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만 우리는 우연을 무척 사랑한다. “아니 이런 우연이····”라는 말은 우리가 우연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려 주는 관용어다. 뜻밖의 일이 일어났을 때 즐겨 쓰는 말이며, 기쁜 일이 있을 때 다르게 표현하는 말로 이 말이 쓴다. 우연은 그렇게 모든 일의 시작이다. 유럽의 신대륙 발견이 그러했고, 페니실린의 발견도 그랬다. 인류의 위대한 탐험이나 엄청난 과학적 성과는 이 우연에서 시작된 일이다. 우연은 사실 우연이 아니다.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경우의 수의 확률로 일어나게 된 일이다. 그러니 우연은 곧 발견하지 못한 필연인 셈이다. 여러 우연은 사건과 만나 역사가 된다. 그렇게 우연이 역사에 남게 된 셈이다. 

여행은 이런 역사를 만들 수 있는 우연을 의도적으로, 역동적으로 생산해 내는 일이다.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은 여행에서 만들어지는 우연의 역동적 사건들을 통해 극복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뜻있는 여행이 중요하다. 물론 모든 우연이 역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기억 속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 갈 사건들도 얼마나 많은가? 다만, 수많은 우연의 희생 속에서 필연이 만들어지고, 그 필연이 인연을 만들며, 인연들이 엮이면서 역사가 될 수 있다. 사람들 사이의 사랑도 그렇고, 인류사의 발전도 마찬가지다. 역동적으로 만들어진 이 ‘우연’들을 어떻게 다시 엮어내 ‘역사’로 만들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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