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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상지 : 월출산 종주

2. 기간 : 2009년 6월 5일(금)부터 6월 6일(토)까지(무박 2일)

3. 참석자 : 강○○, 김○○

4. 장비 계획

□ 잠자리 및 휴식용품 : 배낭, 수통, 스틱, 지도, 랜턴, 볼펜, 수첩, 휴지, 라이터, 카메라, 수건, 휴대전화기, 칫솔-치약, 비닐봉투.
□ 입을 것 : 등산화, 선글라스, 긴바지 1벌, 여벌 반바지 1벌, 등산복 상의 2벌, 방풍쟈켓 1벌, 양말 2켤레, 모자, 안전장갑, 선블럭,
□ 먹을 것 : 육포, 초코바 2개, 영양갱 2개,
□ 구급약 : 진통제, 뿌리는 파스, 붙이는 파스, 압박붕대, 해열제, 대일밴드 등


5. 예상되는 비용

- 서울→광주_심야 우등 : 26,100원×2인 = 52,200원
- 광주→영암_시외버스 : 6000원×2인 = 12,000원
- 영암→천황사_택시 이동 : 5,000원
- 아침식사 : 5000원×2인 : 10,000원
- 점심식사_김밥이나 떡 = 10,000원
- 산행 중 영양식 : 10,000원
- 도갑사에서 산행 뒷풀이 : 20,000
- 도갑사→영암_택시 이용 : 10,000원
- 영암→서울_고속버스 : 18,100×2인 = 36,200원
- 기타 예비비 : 10,000원

>>>> 총 165,400원 예상
각자 82,700원씩 소요되므로 85,000원 회비 책정.


6. 일정

□ 6월 5일(금)

23: 00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모임 간식 및 영양식 구입

□ 6월 6일(토)

○ 서울에서 영암까지

01:30 서울 출발(심야우등)           준비물 점검 및 확인
04:30 광주 도착                          광주까지 가면서 자기
04:40 영암행 시외버스 탑승          영암까지 가면서 자기
06:00 영암 도착

○ 월출산 산행 시간

06:30 천황사 입구 도착                 아침 식사
07:30 산행 시작
08:20 천황사 도착
10:20 통천문 도착(구름다리 지나옴)
11:20 바람재 통과(구정봉)
13:10 미왕재(억새밭)                     점심 식사
14:30 도갑사 도착
15:30 뒷풀이

○ 영암에서 서울로

16:30 영암발 서울행 고속버스 승차
21:30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도착       또 뒷풀이

6. 기타

○ 기상청 예보에 따르면 토요일 월출산 일대의 강수 확률은 매우 낮으며,
    구름만 약간 낄 것으로 보임.

○ 하루 숙박을 할 경우 먼저 안용당(추천 고택) 민박집 섭외
    061)472-0070 / 010-3114-1313. 하루 민박 4만원
    도갑사에서 안용당까지는 대략 3km 도보로 한 시간 정도.
○ 2007년 겨울에 찾아간 월출산 산행기 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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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도 있고 야근도 예정되어 있어서 자전거를 집에 놓고 출근했다. 오늘은 반대로 오전에 비가 온다는 뉴스가 있어서 잠시 망설였다. 게다가 창문을 열어 하늘을 보니 왈칵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하늘이다. 그런데도, 어제 하루 자전거를 타지 않은 몸이 요동을 쳤다. 달려, 달려… 결국 '지금은 비가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전거를 끌고 집을 나서고 말았다. 그러나 10여 분 정도 달리니 빗방울이 하나 둘 긋기 시작했다. 하늘은 이제 곧 엉엉 울어버릴 거야, 라는 듯,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안되겠다 싶어서 구일역으로 방향을 틀었다. 구일역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전철로 출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막상 구일역 자전거 주차대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보니 생각이 또 바뀌었다. 거기에는 누군가가 자전거를 훔쳐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또 구일역 화장실에서 옷 갈아입을 일도 번거롭게만 느껴졌다. 결국 다시 자전거를 몰아 출근을 시작했다. 다행히 왈칵 쏟아질 것 같던 하늘은 끝내 그렁그렁한 눈가만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회사에 도착해 살짝 젖은 운동복을 벗고 수건을 닦았는데 젖은 물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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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명이 떠났고, 국어교과서팀이 2층 국어팀으로 흡수됐고, 3명의 보직 변경이 있었다. 이는 모두 검정교과서 실패 이후에 벌어진 일이다. 책임자였던 J실장은 개인적으로 ‘죽고 싶을 정도였다’라며 괴로움을 토로했다. 마치 거대한 토네이도가 휩쓸고 간 바닷가처럼, 대지진이 일어났던 도시처럼 폐허가 됐다. 듬성듬성 빈자리는 섬처럼 외롭고 거대했다. 남은 사람들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아닌 비겁함과 자괴감을 가슴 속에 심었다.

검정교과서 당락은 운칠기삼(運七技三)? 이런 말이 나온 데는 심사의 기준과 과정, 절차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한권의 교과서 검정에 심사비료를 수백만 원에서 1천만 원까지 받으면서 불합격 판정 사유서는 달랑 A4 2~4장에 불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만으로 저자들이나 편집자들이 결과를 수긍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저자는 불복신청을 하겠다며 펄펄 뛰는가 하면 어떤 저자는 심사위원의 자격을 말하며 화살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러나 합격과 불합격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반드시 있다. 자기합리화도 자기 반성이 없다면 공허하다.
또 편집자 중에는 부실한 저자의 불성실한 태도를 비난하기도 한다. 물론 검정교과서에서 저자가 차지하는 몫은 매우 크다. 그러나 숨은 편집자의 역할 역시 무시할 수 없다. J실장은 편집자와 저자의 책임을 반반이라고 말했다. 성공이든 실패든 그 결과는 저자와 편집자가 고루 나누는 것이라는 지적이다(편집자와 저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른 포스팅에서 더 자세히 언급해 보겠다).
실패 이유에 대해 자기합리화나 그럴듯한 변명으로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 냉철한 자기반성과 비판이 있어야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 사회는 두 번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다. 보수적인 교과서 출판계의 흐름을 보았을 때, 두 번의 실패라는 것은 편집자의 자세와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낙인이 찍히는 것이고 그 결과는 업계에서 퇴출을 의미한다.

다시 한 번 자리 이동이 있을 예정이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할 세 명의 직원을 맞이하기 위한 자리 배치이다. 나 역시 지금 이 자리를 떠나 다른 자리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 주 다함께 단합대회 겸 MT를 떠난다.
시간은 벌써 2009년도에 이루어야 할 작업 시간의 절반 정도를 지나고 있다. 11월 제출일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다시 지옥 같은 야근의 계절이 올 것이다. 시간은 조금씩 목줄을 죄여오고 있다. 다시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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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퇴근 후 대한문 앞 분향소에 다녀왔습니다. 줄이 좀 길 거라고 생각되어 경향신문 앞에서 버스를 내렸죠. 잠깐 역사박물관 앞 분향소를 흘낏 쳐다보고 이내 정동길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정동길을 오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경향신문사를 끼고 정동길로 걷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캐나다 대사관 앞에서 조문행렬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2시간 반을 기다려 조문을 마쳤습니다. 그래도 마음의 짐은 좀처럼 벗어지지 않는군요. 분향소 주변에 완전무장한 경찰들을 배치해 놓고서 입으로는 예우를 한다는 이명박 정부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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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무현 후보 역시 사람이라 번번이 여러 유혹 앞에서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그런 유혹에서 건져낸 것도 건강한 상식과 믿음을 가졌던 많은 시민들의 힘이 아니었을까요?

대선을 열흘도 남지 않은 2002년 12월 10일, 개혁당 구로지역 게시판과 대학 동문회 카페에 썼던 글 "이번 대선은 축제다"의 일부입니다. 선거가 처음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신나게 즐겁게 선거를 즐겼던 적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전 1997년 대선에서는 선거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도 되었던 전적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노무현 후보와 함께 했던 그 때가 제 생애의 최고 절정이었습니다. 이긴다는 확신도 있었고, 변화에 대한 기대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그 역사의 중심에 내가 서있다는 자랑스러움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노무현은 나에게 위대함 그 자체였던 존재였지요.

그렇게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2002년 12월 19일 전 종로 바닥 한가운데서 '수립 민주정부' 노래를 목청껏 외쳤습니다. 누구 하나 손가락질 하지 않았고, 누구 하나 시비걸지 않았고, 모두가 함께 노래 불렀지요.


2.

그러나 다음 해 2003년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 파병을 결정합니다. 당시의 내 심정을 담은 글을 꺼내 보았습니다. 역시 노무현 정부에 대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선택한 대통령이, 엄청난 거짓말을 해대며 전쟁을 벌이는 부시를 쫓아간다는 것에 대해 불쾌함을 넘어 절망적인 심정이다. (중략) 요즘은 그래서 우울하다. 그래서 한껏 기대했던 많은 기대들이 현실이라는 화려한 수식 앞에서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을 보고 있는 기분이다. 그러나 어쩌랴, 살아가는 일이 조금씩 허물어가는 일일텐데....

이처럼 나는 나의 적극적 선택을 통해 선출한 대통령이 지지세력들의 뜻과는 반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에 대해 매우 실망했지요.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인간 노무현의 결정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잠시 몸담고 있던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한다'는 의견표명을 했습니다. 아쉽게 직접적으로 파병을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내지는 못했지만 국가기관의 하나로 그런 의견표명을 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큰 모험이었고, 그런 의견표명이 나오기까지 내부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넘어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전쟁 반대 의견표명만으로도 국가인권위는 다른 국가기관 뿐만 아니라 여야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습니다. 당시 민주당은  "정부가 이미 파병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한 상황에서 이런 의견제시는 부적절하다"고 평하고, 한나라당은 "국가기관이 사실상 대통령의 뜻에 반하는 입장을 밝힌 것은 본분을 망각한 국론분열 선동행위로 인권위원장은 국민 앞에 정중히 사과하고 사퇴하라"고 성명을 발표했죠.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국가인권위를 구해준 사람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었습니다. 단 한마디로 정리했죠.

"인권위는 원래 그런 말하라고 만들어 놓은 기관이다."

국가인권위의 존재 목적과 취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인간 노무현의 결정과 대통령 노무현의 결정은 다를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한국의 세계사적 위치가 어디쯤이며 약소국의 한계가 대통령의 짐이며, 그것은 곧 국민의 고통이라는 것을 깨달았죠.


3.

그리고 그 해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기념일 행사를 국가인권위에서 주관했습니다. 당시 기념식 행사 중에는 우리 사회의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그리고 인권을 위해 일생을 희생해 온 분들이 단상에 올라가 '세계인권선언문'을 차례로 낭독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선언문 낭독이 끝나고 노무현 대통령의 축사 차례가 되었습니다. 단상에 선 노무현 대통령은 "이 분들(선언문 낭독하신 분들) 앞에서 준비된 원고를 읽으면 부끄러울 것 같다"며, 즉석 연설을 시작했지요. 소박하고 담백한 모습의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연설이 시작되고 얼마 후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묵 피켓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인권위 직원들은 사색이 되어 경호팀과 함께 즉각 제지에 나섰고, 객석은 찬물을 끼얹은 듯 썰렁해졌지요. 이때 노무현 대통령은 "몇 분들이 제게 호소하고 불만을 표하고 있다.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다"면서 "국가가 (경쟁사회에서 불리한 여건에 처한 약자를) 돕고 해결해 줘야 인권국가지 인권의 사각지대를 구경만 하는 것이 인권국가냐, 그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 말보다는 저의 실천이 모자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비판하면서도 믿음을 버리지 말고 가자"라고 말하며 그들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고, 피켓 시위는 축사가 끝날 때까지 줄곧 진행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어느 대통령이 저 정도의 인권의식이라도 있었나 싶습니다. 스스로의 실천이 부족함을 성찰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돌아보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물론 그의 실천이 어느정도였는지 역사가 평가하리라고 보며, 지금의 감정적 평가와는 선을 긋고 싶습니다. 그래도 '비판하면서도 믿음은 버리지 말고 가자'라고 하신 그 말씀이 지금에 와서 왜 이리 후회스러운지 모르겠군요. 


4.

노무현 대통령 취임 100일. 군대에서도 100일을 잘 견디면 3년을 견딜 수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100일 휴가도 보내주지요. 저 나름대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100일을 돌아보는 글을 썼었군요.

노무현에 대한 비판은 개혁 세력 전반의 목소리로 나타나야 할 필요가 있지만, 그 주요 목표가 노무현이 되어서는 안된다. "노무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그게 현실이다. 우리는 지나친 꿈을 그에게 기대했던 것이 아닌가?"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노무현을 인정한다. 그가 하는 작업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나 시스템을 제대로 바꾸면 50년이다. 우리 사회에 뿌리 내린 시스템은 바로 미군정 5년간 쌓인 것임을 상기해 보자.

당시 강금실 법무부장관이 한총련 수배자 문제로 수배자의 부모를 만났는데, 경찰들은 보란듯이 그 부모의 자식을 곧바로 잡아들였습니다. 겉으로 보면 통상적인 수배자 검거였을지 모르겠지만, 그 학생은 평상시처럼 학교 바로 앞 길건너 식당에서 학교로 오다가 잡혔던 것이죠. 경찰이 이미 학생의 행동 습관을 알고 있으면서도 잡지 않다가 법무부장관과 한총련 수배자 부모가 모임을 잡은 그 다음 날 잡아들인 셈입니다. 대통령이 바뀌어도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그것은 시스템입니다. 노무현은 눈에 보이는 사안이 아닌 시스템과 싸워온 대통령이었습니다. 검사와의 대화 역시 그런 면에서 접근한 문제였다고 봅니다.


5.

그냥 미안타 사과하고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에서 지적했듯이 그런 말은 임시방편이고 어쩌면 우리 정치현실을 더욱 퇴보하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사과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는가라는 생각을 한다. 대통령의 자리라는 것은 분명 다른 것이다. (중략)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노무현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투쟁가로서의 노무현을 보는 듯하다. 이미 그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순교 아니면 영광만을 향한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가 무척 고심하고 결단을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결정은 온전히 그의 몫이다. 다시 개인이 아닌 구조를 생각한다.

위 글은 2004년 3월, 총선을 얼마 남지 않은 시점, 그는 국회로부터 탄핵을 당한 사건을 보면서 작성한 글의 일부입니다. 이 당시 그를 보면서, 이제 개인 노무현을 보지 않고, 구조 안의 노무현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의 노무현에 대한 생각은 잊어야 하는 시기였죠. 그러면서 탄핵 정국을 바라보았습니다. 여러 촛불집회에도 나갔습니다. 노무현을 구하자는 생각보다는 후진적인 한국의 정치현실을 바로잡자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다시 복귀하길 바라지만 그렇게 물러나게 되어도 국민들의 탄핵반대 집회에서 발현된 에너지가 정치 현실을 한단계 도약시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찌 몰랐을까요, 당신의 순교(적절하지 않은 표현일 수도 있지만)가 지금은 너무 가슴 아픕니다.


6.

열린우리당이 국회 다수 여당이 된 이후, 아이러니하지만 난 정치에서 멀어져갔습니다. 개혁당 시절을 함께 했던 동지들이 열린우리당으로 입당하거나,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하며 민노당으로 옮기는 모습을 쓸쓸하게 지켜보면서 그냥 중립지대로 남고 싶었습니다. 정치개혁을 향한 우리 사회의 열망은 더 뜨거워졌지만 저는 점점 더 차가워졌습니다.

2004년 6월, 김선일 씨가 차가운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해 8월 늙은 노동자가 고공 크레인에서 쓸쓸히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2005년에는 시위 농민이 사망했습니다. 2006년에는 비정규직법이 만들어졌고, 그는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라고 말했죠. 2003년 "국가가 (경쟁사회에서 불리한 여건에 처한 약자를) 돕고 해결해 줘야 인권국가" 라고 말했던 그가 시장의 폭력에 손을 들고 만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재직 기간 동안 10여명이 목숨을 끊었고, 이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은 "분신으로 말하던 시대는 지났다"라는 말로 저를 비롯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유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저 세상에서 그 노동자들을 만난다면 적어도 그 말에 대해서는 사과했으면 좋겠습니다.

2006년, 저 역시 국가인권위원회를 그만두었습니다. 그의 말대로 시장은 인권위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의 인권을 보장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7.

노사모가 노무현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인 바람과 역사적인 소명의식을 투사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발전을 원했고 그런 방식으로 정치의 주체로 서게 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예전에 명계남 씨가 노사모에 대해 쓴 글의 일부를 옮겨 보았습니다. 노사모는 아니지만(그런데 왜 꼭 이렇게 밝혀야 하는지 참 답답하지만), 글을 약간 각색해 보면,
"내가 노무현을 통해 내 자신의 정치적인 바람과 역사적인 소명의식을 투사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원했고, 그런 방식으로 정치의 주체로 서게 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저에게 우리 정치를 보는 시각을 교정해 주었습니다. 또 열정과 기대와 희망을 안겨주었지만 재임 중 회한과 후회와 실망도 더불어 안겨 주었던 사람입니다. 돌이켜 보니, 그와 함께 했던 지난 시기는 정말 치열하게 살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아쉬움은 없습니다. 정말 치열하게 한 시대를 살았던 분으로 기억하겠습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 구조겠지요. 그런 것을 아시기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은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라고 하신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그러나 인간 노무현, 2002년 이전의 노무현은 제 기억에 영원히 남겨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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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모짜르트의 레퀴엠을 들으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다. 해야 할 일들에 조금씩 집중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러다가 문득 인터넷 의 기사가 눈에 띄고, 노무현 전 대통령 관련 뉴스나 글들이 보이면 울컥한다. 쉽지 않은 날들이다. 이 충격은 아무래도 오는 금요일까지 계속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경계할 일이다. 제 감정에만 충실해 먼저 가신 이의 뜻과 바램을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거다. 국민과 역사가 알고 있는 그들의 죄악은 다시 국민과 역사의 심판으로 돌리자. 당신이 심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은 추모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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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대선 운동 당시였을 거다. 어느 강당에서 문성근 씨의 절절한 연설을 듣던 당시 노무현 대통령 후보가 진한 눈물을 흘렸더랬다. 그때 그 연설을 들었던 나로서는 노무현의 눈물이 그저 연극으로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실제로 당시 문성근 씨의 연설은 민주주의를 위해 피흘리신 분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 분들을 기리는 연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노무현의 눈물을 보면서 '참 여린 분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리고 그 감성으로 슬프고 힘든 서민들의 눈물을 알아주길 바라는 한편으로는 아 저렇게 여린 분이 어떻게 대통령이 되어 그 험난한 길을 돌파해 갈 수 있을까 라는 약간의 기우도 있었다. 그런데 그 기우는 현실이 되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관련 영상을 뒤늦게 찾아서 올린다. 민주인사들에 관련한 내용이 아니라 노무현 후보의 역경과 삶에 대한 연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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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이 삐끗했었나? 아니, 바닥을 짚으면서 충격이 있었나 보다. 머리에는 지름 4cm의 혹이 생겼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끄응 하며 신음을 낸다. 어제 무리를 한긴 했나보다. 회사에 생긴 농구 동호회에 처음으로 참석했던 날이다.

첫 모임이라서 많이 나오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농구동호회에 참여하겠다고 통보한 사람이 40여명인데, 정작 체육관에 얼굴을 보인 회원은 20명이 채 안되었다. 아마도 앞으로 이 정도의 인원으로 계속 진행되지 않을까 싶다. 작년에도 활동을 했었는지, 일부 사람들은 안면을 튼 것 같았다. 나에게는 다들 낯설기만 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송대리라도 꼬드겨서 같이 올걸 그랬나 보다, 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그런데 운동이란 것이 그런 거다. 말 보다는 행동이다. 밀치고 당기고 부딪히면서, 서로에게 땀 냄새 발 냄새 풀풀 풍기면서 백 마디의 말로 나눌 정을 몸으로 나누는 것이다. 총무의 이야기를 몇 마디 듣고 난 후 바로 인원을 나누어 반코트 농구 게임을 시작했다.

오랜만에 뛰어 보는 것이니, 몸이 제대로 말을 들을 리 없다. 잘 치는 야구 선수의 타율(3할 대)만큼의 슛 성공률로 벅벅 대며 뛰어다니더니 10분도 되지 않아서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나름대로 자전거 출퇴근으로 다져진 체력이라고 자부했건만 막상 뛰어 보니 안 쓰던 근육들이 자지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실책도 많았고, 너무 쉬운 슛도 놓쳤다. 급기야 무리하게 점프하다가 잘못 떨어져 머리에 큰 혹을 만들고 말았으니, 내 나이를 실감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40분의 농구 경기 시간 동안 선수가 공을 잡고 있는 시간은 4분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렇게 따지면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운동인가. 하지만 나머지 36분의 시간이 경기의 승부를 가른다. 그 시간은 슛의 기회를 만들고, 상대팀의 슛을 막기 위해 뛰어다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농구(축구도 그렇지만)는 팀워크와 희생이 필요한 경기다.

예를 들어, 36분의 시간은 상대팀 진영을 부지런히 뛰어다니면서 수비 뒤 공간을 찾아 들어가거나 다른 이에게 공간을 만들어 주는 일, 스크린플레이를 통해 우리팀에게 좋은 슛 기회를 만드는 일이 슛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4분의 시간에는 적절한 드리블을 통해 슛과 패스의 기회를 만들거나, 넓은 시야로 기회를 만들 수 있는 선수에게 패스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구기 종목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든다. 공통의 목적을 위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협력하고 희생하는 모습 말이다. 아무리 뛰어난 슛터가 있다고 해도, 36분의 시간을 성실하게 임하지 않는다면 그 팀이 승리하기는 쉽지 않다.

비단 농구나 축구만 그런 것일까? 우리는 살면서 공을 가지고 있는 4분에만 너무 신경 쓰다가 36분의 플레이에 소홀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공을 가진 4분에 집중하지 못해 좋은 기회를 놓치는 사람도 있다. 지금 나에게 공(기회)이 왔다면 정확한 상황판단과 신중한 행동으로 슛과 패스를 결정해야 한다. 반면 나에게 공(기회)이 없다면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나에게 공이 올 기회를 만들거나, 팀 동료가 점수를 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에 못지않게 함께 하는 사람을 보라. 그 사람들과 눈빛을 교환하는 것만으로 유기적인 플레이가 가능하다면 승패를 떠나서 그 팀은 훌륭한 팀이다. 지금 나의 옆에서 함께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깝게 지내며 많은 교감을 나누는 일이 중요하다.

앞으로 매주 목요일마다 농구 동호회 모임이 열린다고 한다. 비록 다음날 온몸의 근육들이 아우성치지만 꾸준히 참석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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