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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행성에서 지적 생물이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생물이 자기의 존재 이유를 처음으로 알아냈을 때이다. 만약 우주의 다른 곳에서 지적으로 뛰어난 생물이 지구를 방문했을 때, 그들이 우리의 문명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맨 처음 던지는 질문은 "당신들은 진화를 발견했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 <이기적 유전자> 40쪽

어떤 나라에서 지적 사회가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사회가 자기의 존재 이유를 처음으로 알아냈을 때이다. 만약 지구의 다른 곳에서 문명이 뛰어난 사회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들이 우리의 문명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맨 처음 던지는 질문은 “당신들은 사회의 진화(진보)를 발견했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원문을 쓴 리처드 도킨스에게는 참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 사회의 미개함을 꾸짖고 싶어 그의 글을 차용해 봤다. 이렇게 한 의도에는 작금의 현실의 야만성도 한몫했다. 쉽게 이야기되는 막장 문화는 둘째 치고, 여전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벌어지는 연쇄살인의 극악함, 거기다가 밑도 끝도 없이 벌어지는 공권력의 무지막지함과 그 저열함에 있다. 우리 사회의 진보는 가능한가? 있기는 한가?

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얼마 전에 읽은 책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저, 을유문화사)를 이야기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니 본론으로 충실해 보자.

많은 이들(그러니까 나를 포함해서)이 이 책의 제목만으로 헛된 망상과 철학을 늘어놓았다. 이거 뭐지? 인간은 그러니까 그 근본부터 이기적 존재라는 것인가? 그러니 이 사회는 적자생존의 정글 논리가 지배하는 게 당연하고 약육강식에 따라 질서가 재편되어야 한다는 건가? 강한 놈이 이기는 것이니 재주껏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강한 놈에게 빌붙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얼마전 강만수 장관이 돈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보게 될 종부세 폐지를 밀어붙이고 감세정책을 발표하면서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정책은 오래 가기 힘들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이 아마 저런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은 이렇다.

지구 생명체의 진화는 유전자가 더 많은 복제품을 남기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유전자는 불멸의 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에 따라 인간을 비롯해 모든 생명체는 그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기 위해 마련된 생체기계일 뿐이며, 생체 기계인 생명체는 유전자의 이익, 즉 후세에 유전자의 복제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것이다. 진화의 기본단위는 유전자이며, 이 유전자를 이해할 때 진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유전자의 자기 복제에 대한 욕구를 ‘이기적’이라는 말로 은유적으로 표현했는데, 나는 그런 엄청난 오해(?)를 하고 말았다. 무식해서 부끄러울 뿐이다. 강만수 당신도 무식한 건 마찬가지다.

생물학적으로 유전자 입장에서 본 이타성은 불가능한 개념이다. 그런 유전자가 있다면 애초에 사라지고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치환하는 오류를 범할 사람을 위해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의 특성에 반하는 밈(Meme) 이론, 즉 문화유전론을 내놓았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낳아 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교화시킨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자연계에는 안주할 여지가 없고 세계의 전 역사를 통해 과거에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교육하는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 기계로서 조립되었지만 밈 기계로서 교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들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들의 전제에 반항할 수 있는 것이다. - 349쪽

최근 우리 사회는 새로운 문화 유전자를 발견했다. 바로 집단지성이다. 물론 집단 지성은 대중의 의식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단순한 의식의 반영이라는 대중 의식과 계속해서 발전하는 집단 지성 사이에는 가장 큰 차이가 있다. 바로 소통이다. 막장 드라마라면서도 계속해서 시청률을 상회할 수 있는 것은 소통이 없는 대중 의식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단 지성은 이미 졸렬한 자극과 허무맹랑한 우연, 성찰이 없는 드라마를 막장으로 규정짓고 비판하고 있다. 소통이 만들어 낸 비판의식이다.

반면 소통을 거부하고 오로지 제 갈 길(?)만 가겠다고 외치며 앞에 거치적거리는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하면서 나아가는 저 정부는 그야말로 막장 중의 막장이다. 시민들은 소통의 장에서 지금의 현실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그에 저항하고자 결집하고 있다.
권력과 전제에 대항할 수 있는 힘, 그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있음을 <이기적 유전자>는 밝히고 있다.

다시 도킨스의 말을 차용해 와 정리해 보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먹여 살리는 공권력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지배하려는 권력자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이 사회에는 안주할 여지가 없고 세계의 전 역사를 통해 과거에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교육하는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시민의 한 사람이라는 형식으로 조립되었지만 국민으로서 교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들 권력자들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대한민국에서 깨어있는 시민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권력자의 전제에 반항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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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해

물론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은 참 좋은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먼저 읽었던 나로서는 왜 이렇게 읽기가 더딘지, 이해가 안 가는 문장은 왜 이리 많은지 나의 무식을 탓해야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책의 번역이 엉망이란다.

그러니 되도록 이 전에 나온 동아출판사 <이기적인 유전자>를 볼 것을 추천한다(물론 절판이다, 헌책방 뒤져야 한다). 나도 이 책 팔고 그 책을 찾아서 다시 볼까 생각중이다. 네이버에서 ‘이기적 유전자 번역’만 쳐도 관련 이야기는 쏟아져 나올 것이니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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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연히 본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나는 참 오랜만에 그 정답을 되새길 수 있었다. 제주도의 해녀할머니들을 그린 다큐멘터리였다. 평생 물질로 살아 온 여든 된 해녀할머니에게 물었다. "스킨 스쿠버 장비를 사용하면 더 많은 수확을 하실 텐데요?" "그걸로 하면 한 사람이 100명 하는 일을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안 하세요?" "그렇게 하면 나머지 99명은 어떻게 살라고?"  - 김규항 블로그 <행복이란 무엇인가>에서

집으로 올라오는길 톨게이트를 빠져나올 때 조카의 느닷없는 질문.  

"하이패스가 뭐에요?"
"응, 단말기를 설치하면 톨게이트를 그냥 통과하면서 자동으로 돈이 나가는 거지."
"그럼 그거 설치하면 편리한 거 아니에요?"
"편리하겠지."
"그럼 왜 설치 안하셨어요?"
"글쎄, 편리하면 좋은 걸까?"

잠시후 톨게이트를 지났다. 한복 유니폼으로 차려입은 징수원이 반갑게 설인사를 하고 있었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한참 달리고 있으니 조카가 말을 꺼낸다.

"모든 사람이 하이패스를 사용하면 저 아줌마들은 어디서 일하죠?"

***

귀성전쟁. 그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오며 가며 걸린 시간이 장장 20시간(13+7). 내려갈 때는 13시간이라는 시간을 차 안에서 브레이크와 악셀을 번갈아 밟기만하니 시간이 얼마나 지루한 일인지,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운전하면서 심지어 졸음이 쏟아지기도 하더라. 한시간동안 10km도 채 가기 힘들었다. 누가 그러더라 차를 밀면서 가도 이것보다 빠르겠다고...

속도전에 열을 올리는 지금의 각하께서 보기에는 이 얼마나 어리석은 중생들인가. 열 몇시간을 걸려 꼬질꼬질한 시골에 내려가 후다닥 차례지내고 성묘하고 올라오는 이 비생산적인 일이 그에게는 어떻게 비쳐질까? 그 시간에 삽질이라도 한번 하면 하루 일당 5만원은 나올 건데 말이다.

그렇다, 지지부진하고 느릿느릿 가더라도 거기에 행복이 있다. 십여시간이나 걸려 내려간 고향에서 어르신들은 "뭐 하러 개고생하며 내려왔냐"며 야단치시지만 입이 귀에 걸려 웃으신다. 그 웃음을 줄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 행복이다. 잘 빼입고 간 양복은 엉망진창이 됐고, 넥타이는 대충 풀어헤쳐 볼성사납기 그지 없지만 그런 모습도 대견하고 자랑스럽게 보아주시는 분들이 거기에 있다.

속도는 그런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 느림이 오히려 기다림의 행복을 가져다 주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개발이 누군가의 죽음과 절망과 좌절을 바탕으로 한다면 그것은 개발이 아니라 저주다. 그런 바탕에 세워진 고층빌딩의 화려한 스카이라인은 또 얼마나 많은 좌절과 죽음을 먹고 성장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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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경제학이라는 것이 국민소득이라든가 성장률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언제까지고 넘어서지 못한 채, 빈곤 좌절 소외 절망 등과 범죄 현실도피 스트레스 혼잡 그리고 정신의 죽음과 같은 현실의 모습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러한 경제학을 페기하고 새로운 경제학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 E.F. 슈마허, <작은 것이 아름답다> 중에서


경제를 이야기하면서 빈곤과 가난, 삶의 질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그렇다, 용산의 참사가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아흔아홉개를 가진 자들이 백(100)을 채우기 위해 하나를 가진 사람의 몫을 뺏으려 들 때, 국가는 하나를 가진 사람을 보호하고 그들의 가난이나 빈곤, 삶의 질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그들은 어엿히 서울 한복판에서 가게를 운영하던 중산층이다. 권리금만해도 수천만원이 오가는 그런 가게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쫓겨나는 상황에서 그들을 이성적으로 설득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건설업자들은 깡패들을 동원해 폭력과 횡포를 부리고 국가는 그런 상황을 방조하고 있다가 저항하려는 사람들을 짓밟아 온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그 악순환의 최종 종착지가 바로 오늘날의 용산 참사다. 철거 용역 업체의 폭력, 난동, 성희롱을 견디다 못해 쥐꼬리만한 보상금을 가지고 정처없는 겨울 한복판으로 쫓겨나갔던 세입자들, 철거민들, 그들도 우리의 시민이고 이웃이며 국민이다. 이 죽음과 다를 바 없는 현실의 모습에서 우리는 분명히 언급해야 한다.

많이 가져서 행복한게 아니라 나눌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입에 발린 이야기는 티비와 언론에서 주구장창 떠들어 대지만, 이 사회의 추한 속살은 용산의 참사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말았다.  누구는 한푼이라도 벌어서 먹고 살자고 하다가 불 속에서 타죽어가고, 누구는 하루동안 땅값으로 수백수천만을 벌어들이며서 아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

다음 만화는 곽백수 님의 수도법 개정 문제에 대한 내용이다. 잘 몰랐던 내용이었는데, 만화를 보니 이 역시 물질만능주의의 결과다. 인간 생활에 필수적인 물마저 돈으로 환산하고 이것을 사유화하여 결국은 가난한 사람은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없는 사회로 만들 것이다. 이 악법도 반드시 막아야 할 법 중의 하나가 아닐까?
 


 




/곽백수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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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의 윤리적인 무관심으로 해서 정의가 밟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거야. 걸인 한 사람이 이 겨울에 얼어 죽어도 그것은 우리의 탓이어야 한다. - 황석영 소설 <아우를 위하여> 중에서

아프다, 많이 아프다. 아프다는 의식마저 타들어간다. 차갑던 가슴마저 타들어간다. 목이 마르다. 시원하게 쏟아붓던 그 물대포도 이 불의 신 앞에 엎드렸다. 누구냐, 이 목숨들에 불을 붙인 게…

생때같은 목숨들이 불에 타 죽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 불에 타 죽는 거라고 하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소식만 들어도 아프고 가슴이 타들어가건만, 그렇게 죽어갔던 이들은 얼마나…… 경찰과 시민을 싸우게 죽음으로 내몰았던 이가 있고, 그들을 죽게 만든 제도가 있다. 그 사람을 처벌하지 않고 그 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이런 처참한 일을 또다시 겪을 수밖에 없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작은 일터를 소망했던 사람들이 한겨울 텅빈 건물 옥상에 망루를 세우고 최후의 저항을 하겠다고 하는데, 단 한번의 대화도 없이 그들을 향해 테러진압부대를 투입하는 국가는 누구의 국가인가.

 
합리적인 권위는 능력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것에 의존하는 사람이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비합리적인 권위는 힘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것에 종속된 사람을 착취하는데 봉사한다. - 에리히 프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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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법안, 당신의 눈과 귀를 막고 입을 막으며, 주머니마저 탈탈 털어버릴 법안이다.
이거 안다고 떡하나 더 생기는 것도 아니겠지만, 
우리 이웃과 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만 가지고 있다면
아주 작은 걸음이라도 움직여 보자.
(왜 공익광고도 있지 않나. 작은 움직임이 세상을 바꾼다는)

쟁점이 되는 MB악법이라는 것들이 방송법이니 집시법,
국정원법과 금산분리법 등등이 있다. 
이 법안들이 문제가 있다는 걸 알자.
이 정부 들어서 공부할 거 참 많아졌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좀더 건강해 질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똑똑하고 변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부터 강풀, 최규석, 손문상, 김용민 등 13명의 유명 만화가들이
MB악법 반대 릴레이 카툰을 시작했다.
무한펌질에 무한복사 무한배포가 얼마든지 가능하단다.
최소한 내 블로그에 부지런히 펌질을 하는 게
이 사회의 건강성을 지키기 위한 작은 한 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과 나의 한 걸음이 만나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이바지하리라 본다.
많이 먹어서 행복한 게 아니라 적게 먹어도 함께 먹어서 행복한 사회를 만들자.



/강풀 만화가 메일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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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잠깐 고운 눈이 다녀갔다.
오전 내내 왔던 눈은
이제 하루가 저물어가는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있지만,
다행히 난 오늘 어느 대학의 오래된 건물과
풋풋한 교정에 쌓이는 흰 눈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어서 좋았다.

























 
















































정말 오랫만에 눈다운 눈이었다.
만져보고 뭉쳐보고 던져보고
퍽하며 부서지면서 선명하게 벽에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눈덩이를
곱게 잘 빻은 밀가루처럼 어여쁜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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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가 얻어맞은 것처럼 아프다. 꾹 눌러오는 통증이 숨을 쉬는 것도 힘들다. 나아가 배 전체적인 복통을 수반하니 이건 속수무책이다. 병원에 가야했다. 정초부터 병원이라니 씁쓸하다.

병원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고 소파에 널부러지 숨쉬기를 하며 마음을 다잡아 본다. 짧은 시간이지만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치고 달려간다. 내가 어제 먹은 건 삼겹살, 오늘 아침에는 딸기만 먹고 출근했지. 딸기가 상한 걸까? 아니면 돼지고기의 문제였나? 술은 요며칠 동안 한두잔 마신 게 전부, 술 때문일리는 없고, 혹시 지병에 의한 무언가 알 수 없는 심각한 불치병??? 아냐아냐, 요새 너무 열심히 운동을 해서 무리가 간 건 아닐까? 무슨 소리, 운동 열심히 해서 무리가 가면 근육에 무리가 가지 배는 왜 아파? 그래, 그건 그렇지. 하지만 요새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렇게 아픈 거지?

곧이어 호출이 오고 의사 앞에 앉았다. 증상을 이래저래 이야기해 주고 어제 먹은 거 오늘 먹은 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는데, 술술 자백했다. 그러나 그건 별로 관심사가 아닌듯, 의사는 내 명치를 꾹꾹 눌러보면서 아프냐고 물어보았다. 눌러서 아프지는 않았다.

의사 말로는 '위장염'이란다. 위염도 아니고 장염도 아니고 위장염이라니, 이게 어느 나라 말인가 싶더라. 그러면서 3일치 약을 지어줄 테니 먹고 안 좋으면 다시 오란다. 병의 원인이나, 예방법, 관리요령 등에 대해서는 알아서 하란 말인가? 진료시간 채 5분도 되지 않았다. 주사 한대 놔주는데, 그건 그냥 간호사가 놔준다.

병이 나니 먹는 것도 신중하고, 씹는 일도 세면서 한다. 진작에 그랬어야 하는데 몸이 아파야 그런 걸 보면 얼마나 어리석나. 오늘은 다시 병원에 가봐야겠다. 정초부터 병원 출입이라니 다시 한번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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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 - 8점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류은희.조현천 옮김/현암사



친애하는 토마스 베른하르트 씨에게

 

얼마전에 당신의 소설 <소멸>을 보았다. 정말 대단한 작품이다. 당신의 소설 <소멸>의 이야기 줄거리는 이러했다. 주인공 ‘나(프란츠 요셉 무라우)’는 여동생 결혼식을 다녀온 다음다음날(그러니까 이틀 후) 뜻밖에 가족(부모님과 형)의 교통사고 사망 소식을 접한다. 그리고 장례식에 참석한 후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지만 모두 종교단체에 기부하고 생을 마감한다. 당신 소설의 이야기는 이게 전부다. 내 글만 보면 어떤 이는 스토리가 빈약하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그런 오해도 살만하다.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장장 500쪽에 걸쳐 서술되고 있다. 그것도 단 두 문장으로 말이다. 1부 '전보'가 가족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사진을 보면서 가족에 대해 사유하는 장면이고, 2부 '유언'은 고향에 돌아가 장례식을 치루는 일련의 과정에서 떠오르는 사유들의 집합이다. 단 두 문단으로 서술되어 있는 이야기, 게다가 줄거리가 단순한 만큼 나머지는 당신의 온갖 사유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난생 처음 접해보는 새로운 문체와 서술에 크게 놀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았다. 당신 가족과 조국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온갖 비난과 모욕이 넘쳐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주인공 ‘나’의 냉소다. 곧 소설가 당신의 냉소이기도 하다. 이렇듯 지독한 냉소는 힘이 될 수 있을까?

 

세기의 전환기에 이르면 사유하는 것으로, 사유하는 것을 통해 존재해 온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며, 사유하는 인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는 단 한 가지, 이 세기가 끝나기 전에 자살하라는 것입니다. 〈p.495〉

 

세상에 자살을 조언하다니, 어떻게 태어난 삶인데 사유하는 인간은 자살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가. 이런 지독한 냉소의 배경에는 자위적인 오만이 담겨 있음을 보았다. 당신은 오만함을 통해 자신을 경멸했다. 그리고 이것을 무기로 세상을 경멸하고, 물질 중심으로 흐르는 세상에 저항했으며, 끝내 세상에 잡아먹히지 않으면서 멋지게(?) 한방 날렸다. 그런 점에서 당신을 존경할 수 있을 법하다. 게다가 죽어서 남긴 실제 유언을 들으니 더욱 놀랍다.

 

“내가 쓴 것은 모두 저작권법의 유효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국경 내에서 공연되고 인쇄되거나 낭독되는 것을 금한다.”

 

작가가 자신이 쓴 창작품이 자신의 나라에서 출판, 공연, 인쇄 되는 것을 금하다니, 이것은 국가에 대한 증오일까, 역설적인 사랑일까? 아무튼 미친 짓이다. 그만큼 이 세상을 향한 당신의 굳은 의지이자 절박한 메시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국가의 권위와 폭력에 의해 셰어마이어와 같은 사람이 피해를 입고 아무 보상도 없이 여생을 살아가고, 나치와 협력해 수많은 사람을 살해하는 데 협력하거나 개입했던 이들에게 공로훈장을 떠안기며 터무니없는 연금을 송금하는 국가는 오스트리아에만 있는 게 아니다. 부끄럽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본다면 당신은 까무러칠 것이다. 아마도 환생이란 것이 있어 당신 같은 대작가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우리나라는 가급적 피해서 태어나길 바랄 뿐이다. 아니, 제발 한국에 태어나 당신의 그 글로 멋진 한방을 대한민국에 날려주기를 기대하고 싶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지도하는 이들은 물질에 사로잡혀 정신적 가치를 전혀 고려치 않는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다. 모든 잣대와 기준을 경제적 가치에 두고 경쟁만이 최고의 선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며 심지어 꼬맹이 아이들마저 경쟁 체제로 내몰고 있다. 이 권력은 국가의 권력에 도전하고 권위에 상처를 주는 글을 썼다는 것만으로 인신을 구속하고 있다. 물론 그런 지도자를 선택한 것은 대한민국 사람들이다. 부끄럽지만 물질에 현혹되어, 747이니 주가 3000이니 하는 말에 넘어간 사람이 내 이웃이고, 나 역시 그런 선택을 수수방관했음을 자백한다. 그러니 이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선출된 권력을 욕하는 건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어야 하는 일이다. 이럴 때이니 냉소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냉소 이전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도대체 이런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당신에게 묻고 싶다.



소멸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토마스 베른하르트 (현암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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