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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명의 인물들이 등장해 각각 밥딜런의 일생을 보여주었던 영화.

하지만 밥 딜런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영화의 행간을 읽기에는
그 속도감을 쫓아가기도 힘들뿐더러,
여러 배우들의 연기들이 각각의 파편화로 인해 난해하기만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술과 예술가가 분리되고,
노래와 가수를 함께 바라보지 않으며,
예술가가 살아야 하는 삶과 시대를 작의적으로 동일시하려는 이들에게
영화는 예술가가 살아야 할 삶의 무게를 진지하게 말해주고 있다.

영화가 모두 끝나고 엔딩자막이 올라오며 흐르는 노래는
어쩌면 시대에 희생당하는 예술가의 좌절을 담은 것처럼
슬프게 슬프게 흘러갔다.

"Knock knock knocking on heaven's door"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I'm not there>,
그 존재감의 상실만큼이나 내 가슴을 두드리는 마지막 음악.

"똑똑, 천국의 문을 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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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 밥먹는다.

- 무슨 반찬

- 개구리 반찬

- 살았니? 죽었니?



아마도 누구나 기억하는 전래놀이의 노랫말이다. 여기서 개구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에 따라 놀이는 긴박하게 전개된다. 아무튼 삶과 죽음은 이 놀이에서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인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살아있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죽은 고기를 먹고 있다.(물론 가끔 '산낙지'도 먹어주고 있다) 불이라는 문명의 매체를 이용해 안전하게(?) 섭취하고 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하자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환경운동을 하는 후배는 채식주의자다. 유감스럽게도 그 후배와 술한잔도 못해봐서 채식주의자의 생활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채식주의자가 살아가야할 이 세상은 보통의 사람보다 몇배는 힘들 것이다. 최소한 집밖에서 돈주고  먹는 음식 중에서 완전 채식을 찾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이니 말이다.


작가 한강의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를 읽게 된 것은 아무래도 지금의 쇠고기 정국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다 읽고 나서 판단한 거지만, 난 한강이라는 소설가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채식주의와는 실상 그다지 관계가 깊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상처받은 영혼과 그 영혼에게서 식물적 상상력의 감화를 받지만 세속된 욕망을 추구햇던 예술가, 그리고 식물이 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동생을 바라보는 언니의 이야기이다. 상처와 욕망과 죽음, 세개의 이야기를 이처럼 잘 버무려 내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너무 과도한 상상을 끌어오지 않았나 싶으면서도 이야기들은 그 안에서 날실과 씨실이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세개의 이야기는 연결되어 있지만 또한 각각의 독립적인 이야기로 잘 안착하고 있다. 하지만 식물적 상상력이 욕망과 어우러지는 두번째 작품 '몽고반점'은 이야기의 전개가 너무 극적이라서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이야기의 탄탄한 구성과 깔끔한 문체는 막힘없는 독서를 가능케 했다. 이 책은 '채식주의'에 대한 호기심으로 책을 펼쳐들지 않기를 바란다. 잘 스여진 연작 소설, 풍부한 상상력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소설로서 충분히 만족할만한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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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본인은 퇴직금이 지급되지 않는다면 처벌을 원하십니까?"


근로감독관은 그렇게 물어봤다. 바로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한때나마 같이 한솥밥을 먹고, 시답지 않은 농담도 주고받으며 웃기도 했던 사람이다. 왕따도 없었고 따돌림도 없었다. 업무적으로도 과중한 스트레스는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였으니, 사실상 회사생활이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었다.


"네...."


내가 누군가의 처벌을 원하느냐를 따지는 지금의 노동법이 야속하다. 이건 화장실벽에 낙서한 친구를 선생님께 고자질하는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처벌을 원하냐'는 근로감독관의 얘기에 선뜻 대답을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허나 나의 이런 머뭇거림과는 상관없이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근로감독관의 얘기를 들어보니, 예전에는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형사고발이 되었는데, 요새는 법령이 바뀌어 지급하지 않아도 진정인에 의해 진정이 취하되면 형사처벌을 면할 수 있다고 한다. 게다가 퇴직금 미지급 건의 경우 형사처벌이 되어도 대개는 벌금형에 그치고 있으며, 벌금형은 고작해야 몇십만원 정도이다. 그 정도의 형사처벌을 꺼릴게 없다 생각하는 악랄한 고용주라면 아마 벌금을 내고 말 것이다. 물론 노동자는 이후 대한법률구조공단의 도움을 받아 민사소송을 낼 수 있다. 대한법률구조공단의 민사소송비는 무료라고 한다.


노동청에서는 일단 사업주에게 경고장을 보낸다고 한다. 쉽게 쉽게 처리됐으면 하지만 세상일이 마음처럼 될까. 어쩌면 민사소송까지 갈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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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항쟁을 만들었다.
21년전 돌과 쇠파이프와 피로 이루어낸 승리를
우리는 지금 작은 촛불 하나로 만들어 내고 말았다.

독재자의 얼굴이 달라졌다고 해서
독재자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고문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고문의 형태가 달라졌을 뿐이며,
감시와 사찰의 흔적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상존하고 있다.
식민의 구호는 퇴색되었다고 하나
친미사대주의는 여전히 판을 치고 있다.
마찬가지로 '민중'이라는 말은 역사 속에서 나와
지금 우리 광장에 다시 서고 있다.

광화문에서 남대문까지 이어진 촛불은
한점의 희망들이 모여 만든 거대한 불바다였다.
인간이 만든 어느 불빛이 이처럼 맑고 순수하며 위대할 수 있을까.




[출처] 벗이여 해방이 온다 - 윤선애 |작성자 파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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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내려가면 으례 방문해야 하는 곳은 큰집, 작은집, 큰고모집, 외갓집이 있다. 앞에 세 곳은 구례에 모두 있으니 하루만에 다 방문할 수 있지만 외갓집만은 순천시 주암면에 자리잡고 있다. 구례에서 멀다면 멀고, 서울에 비하면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 거리다. 6일 큰고모집에서 자고 7일 외갓집을 향해 나섰다. 


사실 아침 일찍 나섰지만, 기왕이면 화엄사와 송광사에 들려 구경이나 가자고 말씀드렸다. 아버지 생신도 끼어 있고 해서 오랜만에 가족들끼리 나들이를 제안해 본 것이다. 아버지는 바쁜 시기에 놀러다니는 게 못할 짓이라며 펄쩍 뒤셨다. 하지만 어차피 외갓집에 가도 외숙부나 외숙모 모두 들일 나가셨을 테니 좀 늦게 들어가는 게 좋다고 설득을 했다. 혀를 차시면서도 이내 그렇게 하자고 하신다.


화엄사는 구례군에 속해 있으며 지리산 중턱에 있다. 지리산에 열번 이상 드나들었으면서도 화엄사에 들린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아버지는 감회가 새로우셨을까, 예전에 보았던 낡은 돌계단에 눈길을 오랫동안 던지셨다.


"나 어렸을 때랑 똑같이 그대로 있네. 참 세월 많이 흘렀는데 말이야."


화엄사는 유난히도 단청이 칠해지지 않은 건물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는 사찰보다 더 유서깊고 기품이 넘친다. 게다가 2층식으로 지어진 대웅전 건물의 옆 기둥은 위태롭다 싶을 정도로 휘어져 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다.

 











 

화엄사 구경을 마치고 송광사로 차를 몰았다. 섬진강 옆 한적한 국도는 드라이브 코스로 이미 많이 알려진 곳이다. 맑고 고요하게 흐르는 섬진강과 오래된 숲들이 산을 이루고 있는 사이로 난 길은 여름에도 짙게 드리워진 그늘로 인해 공기도 상쾌하다.


한시간여를 달려 송광사에 도착했다. 송광사는 일전에 한국관광공사에서 보내주는 여행 이벤트를 통해 한번 다녀온 이후로 기억에 많이 남는 곳이다.


이곳은 외갓집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어머니에게 각별한 기억이 있는 곳이다. 할머니의 생신이었을 때 외갓집 식구와 어머니 아버지 모두 함께 송광사 나들이를 오셨다고 한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10년이 훨씬 넘은 일이지만 어머니에게 그 기억은 참으로 소중한 기억이다. 1년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외갓집과 연관된 것을 생각하면 한숨부터 쉬시는 어머니에게 그래서 송광사는 더 아련하게 다가오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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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 구례의 화엄사와 순천의 송광사는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있어 오래된 추억의 한편을 가진 곳이다.


돌아보면 이날 참으로 뜻깊은 가족여행이었다. 난 두분의 기억을 되물림 받을 수 있었고, 두분은 새로운 기억의 조각을 만들 수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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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번기에는 부엌의 부지깽이도 돕고, 부뚜막의 고양이 손도 아쉽단다. 아버지는 그래서 시골의 모내기에 맞춰 고향에 내려가셨다. 아버지의 고향은 전라남도 구례의 산골마을이다.


그리고 나와 어머니는 현충일이 낀 연휴에 맞춰, 그러니까 국민MT(72시간 릴레이 촛불집회) 기간에 구례로 내려갔다. 일손을 돕자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 기간에 아버지의 생신도 끼어 있기도 했다.


5일 오후 3시 15분 영등포역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다. 집에 차가 생긴 이후 기차를 타고 시골집에 내려갈 일은 없었다. 오래만의 기차여행이다. 어머니와 함께 맥주도 사서 마시고 삶은 계란 껍질도 벗겨보았다. 그러다가 영등포역에서 구입한 <한겨레21> 잡지를 보기도 하고, 또 그러다 시큰둥해지면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에 멍한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오랜만의 기차여행이라서 그런걸까. 생각보다 금방 시간이 흘러갔다. 구례구역에는 아버지가 마중나와 계셨다.


가운데 적갈색 기와집이 큰집이다. 대부분이 양옥집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큰집은 옛집 그대로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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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기술이 발달하고, 재배작물이 좋아져도 농번기는 여전히 일손이 부족하다. 노령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가꾸는 논과 밭, 키우는 닭과 벌들이 그분들의 손길을 아우성대며 찾고 난리다.


내가 내려갔을 때는 이미 모내기가 거의 끝나 있었다. 아버지는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지붕수리를 하고, 새롭게 페인트칠까지 마무리하셨다.


모내기 끝났다고 할일이 없을까. 큰집에서 멀지 않은 고모집에 갔을 때는 감자수확에 나섰다. 알이 퉁실하게 커다란 감자들이 울렁울렁대며 흙밭에서 나오는 모양새가 재밌다.


고모네 아들, 그러니까 나에게는 사촌이 되겠는데, 그는 몇년전 베트남 여성과 국제결혼을 했다. 지금 둘에게는 유라는 세살박이 딸이 있는데, 항창 엄마아빠를 찾는다. 이날도 감자밭까지 쫓아나왔다. 엄마아빠, 그리고 우리 가족까지 거들어 감자를 캐는데, 이 걸음마도 서툰 아기도 일손을 돕는다. 캐논 감자를 주워 바구니에 넣는데, 그저 재밌다. 엄마는 목욕한지 얼마 안됐다고 속상해 하면서도 그런 모습이 기특했나보다. 한참동안 나와 함께 감자줍기 '놀이'를 하며 밭에서 뒹굴었다. 거침없이 흙을 만지는 그 앙증맞은 손이 어쩜 그리도 귀여울 수 있을까.







 

고속도로로 올라가는 산 중턱의 밭.
일을 마치고 저녁이 됐다. 고향 마을 뒤편 산속에서는 얼마전부터 큰공사가 한창이다. 광양과 전주를 잇는 고속도로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2010년이면 완공된다고 한다. 이 문제 때문에 한때 동네 인심이 흉흉해진 일도 있다.


이 도로가 생긴다면 고향 내려가기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하지만 마을 가까이 생기는 고속도로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여러가지 피해를 생각할 때 그리 유쾌하지 않다.


저녁을 함께 먹고나서, 큰어머니는 산책 겸 그 고속도로에 올라가 보자고 하신다.


"아니 공사현장에, 그것도 고속도로에 함부로 올라가도 되요?"

"꺽정말어. 밤에는 사람도 없당께. 마을 사람들도 가끔 거그로 마실나가고 그랴. 암시랑토 안혀."


그렇게 해서 야밤에 고속도로로 올라가는 마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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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멀리 끄트머리에 있는 산이 지리산 노고단 봉우리 근처다.


 

고속도로 위에서 찍은 사진이다. 셔터속도를 길게 놓고, 노출도 좀 올려줬더니 마치 대낮처럼 지나치게 밝게 나왔다. 하지만 가로등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저녁무렵에 찍었다. 물론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이다. 앞에 보이는 마을이 고향마을이다. 지리산과 우리마을 사이에 평야지대가 있다. 거기에는 큰아버지의 논도 있고, 작은아버지의 밭도 있다. 산책을 하다보니 어두워졌다.


큰어머니는 이제 논둑에 콩만 심으면 거진 일이 마무리됐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건 그저 눈에 보이는 일만 마무리 되셨다는 말일게다. 논에 모만 심어놓는다고 잘 자랄 일이 아니다. 비가 오면 오는대로, 가물면 가문대로 신경 쓸 일이 많다. 논일만 있을까, 상추며 고추며 밭에서 자라는 곡물들은 병충해가 올까 노심초사해야 한다. 일도 일이지만 농약치는 일은 노령의 나이에 하실만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하신다. 아침저녁을 벌통을 살피는 일도 쉬지 않는다. 뜨거운 여름한철 벌들의 활동이 왕성하기 때문이다. 기르는 가축들도 살핀다. 큰집에서는 개 한마리와 닭몇마리를 키우는 게 고작이지만, 그래도 신경쓸 구석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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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생명을 싹 띄우게 하고, 알맞게 성장할 수 있도록 보살피며, 그 결실을 제대로 맺을 수 있게 하는 일련의 과정은 참으로 숭고한 일이다. 우리 입안에 들어가는 우리 먹거리에 대해 그것이 어떤 과정과 노력을 거쳐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잘 모른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경외심은 가질 필요가 있다.


지금의 촛불집회가 벌어지는 배경에는 어쩌면 생명에 대한 경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풀을 먹는 소에게 육식을 시키는 것이나, 대규모로 사육되는 가축들의 환경이나, 안전한 먹거리 생산에 대한 철학보다는 자본의 이익을 위해 생명도 조작할 수 있다는 그 무서운 몰이해가 자리하고 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동네 뒤에 생기는 고속도로도 대운하만큼 이곳사람들에겐 버거운 일이다. 도시사람들의 부와 편익만을 보장하고, 그 길 옆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과 안녕은 돌보지 않는 일은 대운하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 마음 안에 대운하가 아닐까.


큰아버지는 내가 사진찍는 모양새를 보고 동네 입구에 세워놓은 "범죄없는 마을" 표지판을 찍으라고 하셨다. 오래전에 세워진 이 표지판은 이 마을에 대한 큰아버지의 자부심이다. 사진을 찍으며 내 마음 안의 대운하도 찍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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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사진이다.
그러니까 잠실에 있는 <살아있는 미술관>에 가고,
시청 서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도 참가하고,
돌아오는 길에 성산대교의 야경도 찍은 것이다.
 
이날 하루종일 자전거로 돌아다닌 거리는 대략 100km.
이날의 황사는 최악이었다.
마스크를 단단히 하고 나갔다고 하지만
저녁에는 목이 칼칼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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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야경은 조리개를 최대한 조여주어야
사진처럼 빛의 파장이 멋지게 나올 수 있다.
물론 조리개를 조인다면,
그만큼 셔터속도가 늘어나니,
그런부분을 감안해 사진기를 고정할 수 있는 지지대를 마련하거나
삼각대를 준비해서 찍는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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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존

<살아있는 미술관>에서는 명화속의 한장면을 셋트장으로 만들었다.

외워야 할 것은 어찌 그리 많았는지, 생각해 보면 미술시간은 가끔 곤혹스러운 일의 연속이었다. 표현의 재미를 느끼기는 커녕 어찌하면 선생님한테 핀잔듣지 않을까 전전긍긍해야 했고, 어쩌다 준비물을 빼먹으면 다른반을 돌아다니면서 준비물 챙기느라 바빴다. 미술감상은 감상이 아니라 암기였고, 표현도 표현이 아니라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는 일과 다를게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 아주 오래전 일이다. 


그렇게 대학에 다니기 전까지는 미술관 근처도 가지 못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갔다. 선배가 미술관 가자고 했다. 그리고 찾아간 미술관은 인사동의 학고재 화랑. 당시 강요배 화백의 4.3제주항쟁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대학생활하면서 미술관에 갈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시청 근처의 직장을 다니면서부터 서울 시립미술관이나 덕수궁내 미술관을 종종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미술감상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요즘 아이들은 얼마나 좋은가. 물론 우리때보다 더 힘든 사교육에 치여 살고 있긴 하지만, 미술관이나 음악회 등 다양한 통로로 문화활동을 접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지난 금요일 <살아있는 미술관>에 다녀왔다. 최첨단 IT기술이 도입된 기술로 마치 사이버체험관에 온듯한 재미를 맛볼 수 있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좀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아이들 눈높이에 많이 맞추어져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간다면 무척 재미있어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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