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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혐오를 앞세워 갈라치기 하는 세력과 분노와 공포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세력의 싸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가 가진 공통점이다.

대선 기간 중 양측은 총칼만 안 들었을 뿐, 말로 오가는 증오의 표현들은 총칼 못지 않았다. 이렇게 비이성적인 난투극으로 대선을 치루는 건 이제 그만했으면 싶은 마음인데, 과연 그런 게 가능해질까?  

상대를 상대로 이해하지 않고, 전부 몰살하고 절멸해야할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양쪽 다 있더라. 그런 사람들에게 먹이(관심)를 주는 사람도 많다. 생각을 하면서 살지 않으면 그냥 사는 대로 생각하는 바보가 된 사람들이다.

이재명이든 윤석렬이든 대통령 후보까지 올라왔으면 그만한 시대적 요구가 반영된 것인데 그걸 보지 않고 어떻게든 흠결만 잡고 늘어졌다면 스스로의 정신건강을 좀 의심해 보시길 바란다. 검증? 검증이 선을 넘으면 그냥 확증편향의 사고일 뿐이고, 음모론일 뿐이다. 음모론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만한 사람들도 열심히 음모론을 전파하는 것을 보면 누구말대로 선거가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 극단적 대립만 불러오는 지금의 정치 체제는 바뀌어야 한다. 민주당은 지금이라도 이런 극단적이고 비이성적 광기만을 불러오는 정치 체제를 개혁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유권자들이 '모 아니면 도'만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승자가 모든 걸 독식하는 선거 제도를 바꾸지 않고서는 건강한 민주주의를 만들어 갈 수 없다.

윤석열 당선자도 정치의 극단적 모습을 아주 생생히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국민들의 요구가 민주당 아니면 국민의 힘 두 가지 선택지로만 선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또록 정치의 자장 안에서 협력하고 논쟁하는 모습을 보일 때 민주주의는 한단계 더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다.

윤 당선자는 정권 교체를 모토로 내세웠다. 바라건대, 정권 교체를 넘어 정치 교체를 추진하는 지도자가 되어 주길 바란다.

막판 정치 교체를 전면에 내세워 표를 받은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매번 위기의 순간에만 정치 교체를 내세워 구걸하지 말고 다수당의 지도력을 발휘해 윤석열 당선자와 정치적 대협상에 나서야 한다.

더 강력한 민주주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주인된 삶을 살 수 있게 돕는다. 주인된 사람들의 의식이 모일수록 민주주의는 더 강해질 수 있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이런 선순환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극단적 대립을 보였던 대선이었지만 그래도 여러 모습들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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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책, 불온한 사상


사람의 생각은 말과 글로 전달된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대화를 하듯이, 많은 이에게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글이 필요하다. 여러 권력자들이 자신의 독재 권력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반대자들의 말과 글을 차단했다. 때로는 죽음으로, 때로는 금서라는 형식으로····

중세 시대 고대 인문학 관련 서적들은 이교도의 사상이라는 이유로 종교적 권력 아래 대중에게서 격리되었다. 격리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시간의 무차별적인 공격 앞에 속절없이 사라져 갔던 고대 문헌들을 기어이 끄집어 내어 세상앞에 내놓았던 사람들이 있다. 이 책 <1417 근대의 탄생>은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인 포조 브라촐리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포조는 중세의 기독교 권력의 몰락해 가던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보았던 로마 교황청 서기이기도 했고, 인문학과 과학 부흥을 기뻐하고 적극적으로 고대 서적 발굴에 앞장섰던 인문학자이기도 했다. 어느 시대나 경계인이 가졌던 모순을 모두 가진 인물이었고, 생각과 사상도 어느 하나로 대변하기 어려운 다양성을 갖고 있던 인물이다. 그런 경계인이었던 포조가 르네상스의 시기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 책은 중세의 몰락과 르네상스의 시작점에 있던 한 인물-포조 브라촐리니-이 독일의 오래된 수도원에서 발견한 책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의미를 쫓아가는 내용이다.

2천년 전에 쓰인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기원전 1세기 고대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철학 서사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핵심적 내용들은 더 거슬러 올라 기원전 4세기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다다른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무엇이 좋고 악한지는 쾌락과 고통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고, 가장 좋은 쾌락은 지적 탐구에서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죽음은 몸과 영혼의 종말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신은 인간을 벌주거나 보상하는데 관심이 없고, 우주는 무한하고 영원하며,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궁극적으로 빈 공간을 움직이는 원자들의 움직임과 상호 작용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4세기의 이런 주장들은 지금 돌아보아도 매우 놀랍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고 있고, 신이 인간사에 개입하여 상과 벌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상은 신의 권능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성직자들이 있던 중세에서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다. 아니 중세 유럽만이 아니라 태양계 바깥까지 우주선을 보내고 있는 현재도 일부 종교인들이 들으면 펄쩍 뛸만한 무신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물론 세상에 영원한 진리는 없을 것이다. 먼 훗날 어떤 과학적 발견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지도 모르고,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인류가 이루어 낸 과학적 철학적 사실들로 본다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루크레티우스의 서사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중심으로 저자는 14세기 유럽의 과학적 발견, 종교적 갈등, 철학적 성찰 등을 꼼꼼한 고증 자료와 함께 엮었다. 하나의 사건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유추해 내는 힘은 단순한 상상상력을 넘어 치밀한 고증이 있을 때 더 빛이 난다.

교황청 서기였고 피렌체의 총리까지 지냈으며 탁월한 책 사냥꾼이었던 인문학자 포조의 기록과 그가 다른 학자들과 어울렸던 편지들, 그의 행적을 정리한 기록물들을 중심으로 보다 역동적인 시대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종교재판의 잔혹함과 비이성적 광기, 당시 고위 성직자들의 위선과 타락을 포조의 글과 기록을 통해 보면, 가장 어두울 때 빛나는 작은 불씨들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은 어떤 동물보다 추상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며 이것이 인류가 사회성을 갖고 지금까지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인류의 상상력은 신에 대한 공포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나면서 진실을 외면하고 진리에 대한 성찰을 가로막았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인간에게 관심이 없을 거라는 오래된 진실이 21세기를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 받고 있는 현실은 참 아이러니하다.


<장미의 이름>과 <1417 근대의 탄생>

중세시대 가장 불온했다는 책이 가장 빛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분노와 공포로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고 그들이 생명과 재산을 갈취하던 권력이 과학의 발전과 인문학적 사상에 밀려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1417 근대의 탄생>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떠올리게 했다. <장미의 이름>은 어느 수도원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이 살인은 광신도였던 늙은 수도승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리를 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는 수도사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죽음을 신을 배신한 자들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위장하여 공포를 조장하려는 음모였다. <장미의 이름>은 이미 부패할대로 부패했던 당시 기독교 권력의 모습과 함께 분노와 공포로 대중을 지배하려던 성직자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작품이다.

두 책은 모두 중세 시대의 종교 권력이 무너지는 과정과 함께 고대 문헌이 가져온 충격이 당시의 성직자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보여 준 책이다. <1417 근대의 탄생>은 실제 당시 사람들의 활동과 기록을 통해 탐사 보도 형식으로 사실을 전달했다면 <장미의 이름>은 살인사건을 쫓는 수도사의 이야기로 당시의 광기를 고발하고 있다. <1417 근대의 탄생>이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철학과 사상이 르네상스 시기와 인문학과 과학과 만나는 지점에 좀더 집중했다면, <장미의 이름>은 중세 기독교의 타락과 비이성에 더 집중했다.

<장미의 이름>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세상이 바뀌는 과정의 이야기에 좀더 흥미를 갖고 <1417 근대의 탄생>을 읽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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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도 혁명도 실시간 SNS로 전파되는 세상이다. 머나먼 타국땅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에 신경이 집중된다. 지하벙커에서 태어나는 아이의 울음도 길바닥에서 죽어가는 군인의 모습도 내 작은 휴대폰으로 시시각각 전달되었다.

아파트를 향해 떨어지는 미사일의 모습, 곧바로 이어지는 폭발과 섬광. 전쟁에서 빛과 열은 대부분 참혹하다. 차라리 지하의 어둠이 더 평화롭다. 전쟁이 일상의 모든 걸 거꾸로 바꿔놓고 말았다.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안도하면서도 여전히 거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세상은 그만큼 가까워졌다. 부디 이 전쟁이 어서 끝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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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권이 생긴 이래 대통령 선거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었다. 직접적인 선거 활동을 한 경우도 있었고, 간접적인 지지-반대 발언을 온라인 공간에서 펼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대선은 말 꺼내기가 쉽지 않다. 줄곧 지지했던 민주당에 표를 주기가 어렵다.

민주당에 대한 불신이 생긴 건 서울과 부산시장에 후보를 냈을 때부터다. 그때 민주당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말로만 반성하는 관행, 서민을 위한 정책 실종,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신, 민중을 외면하는 나라 살림...

무엇보다 변하지 않은 공포와 분노 마케팅. 언제까지 보수세력에 대한 반대 이익만 취득하며 살 건가? 이런 이유로 당연히 민주당은 이제 심판의 주역이 아닌 대상이 되고 말았다.  

누군가는 가스라이팅이라고 한다. 우리가 더 지지해 주지 않아서... 우리가 더 밀어주지 않아서... 우리가 더 열심히 응원하지 않아서... 한국 사회가 뒤로 가는 열차에 올라탄 것일까?  마치 "나에게 표를 안주면 국힘당이 되는데, 그래도 좋아?"라며 사람들을 길들여 왔고, 그렇게 몸집을 키워오더니 이제 스스로 괴물이 되고 말았다. 민주당은 사람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당연히 국힘당 윤석렬은 최악의 후보다. 그런데 그 최악의 후보와 민주당은 졸전을 치르고 있다. 역시 민주당 주변인들은 최악의 후보를 막아야 한다며 표를 달라고 한다.

물론 윤석렬에 비해 이재명 후보는 좋은 후보다. 대장동 의혹도 부풀려진거라는데 동의하며 그의 성품이 좀 모질고 막가는 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선택받았다는 것은 그것을 상쇄할만한 그의 장점이 더 크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민주당도 그러한가?

나에게 "윤석렬을 막기 위해 이재명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은 오히려 더더욱 나를 망설이게 한다. 민주당은 언제까지 국힘당의 반대파로만 살려고 하나? 결국 국힘당과의 적대적 공존으로 생명을 유지하겠다는 거 아닌가? 마치 남북의 보수 세력들이 분단체제를 이용해 온 것처럼 말이다.

허상과 꿈을 쫓는 일이 되겠지만, 그냥 이 땅이 일궈온 민주주의를 믿기로 했다. 어떤 세력도 어떤 권력도 민주주의의 시스템에서 권력은 제한적일 것이다. 이재명이든 윤석렬이든 그들 역시 이 제도의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할 것이다. 적어도 이번 선거는 이 지겨운 가스라이팅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동안 해왔듯이 다시 민주당에 표를 준다면 민주당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땅의 대통령 선거는 승자독식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변화와 민주주의의 승리를 꿈꾸는 나는 이번 선거의 목표를 민주당 심판과 양당체제의 균열에 두겠다. 아마도 이 기조는 민주당이 다당제 정착 및 결선투표제 실천이 없다면 계속 이어질 것이다.

더이상 공포와 분노 마케팅으로 표를 구걸하지 마시라. 새로운 미래를 보여주겠다면 평소의 행동으로 보여달라. 매번 이렇게 선거 때만 하겠다고 하지 말고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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