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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가 없던 시절 아이들의 놀이는 주로 야외에서 이루어졌다. 술래잡기, 다방구, 얼음땡, 오징어(일종의 야외 전투 게임) 등은 어릴 적 하루해를 짧게 만들었던 즐거운 놀이들이었다. 잘 못하는 아이들은 깍두기를 시키고, 나름대로 작전과 전략을 고민하면서 놀이를 즐겼다. 하지만 이런 놀이를 하다가 종종 다치는 일도 있었다. 찰과상 정도는 너무나 빈번히 일어났고, 멍듦, 타박상 등도 심심치 않게 생겼다. 심하면 탈골, 골절이나 인대 파열 등이 발생하곤 했고 아주 심한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장애를 입거나 사망 사고로 이어진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돌아보면 우리의 놀이는 꽤나 격렬하고 다이내믹했었다.


그렇다면 요즘 아이들은 어떨까. 야외 놀이라고 해봐야 축구나 농구, 야구 등 성인들이 스포츠라고 했던 것들이 대부분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다방구니 술래잡기니 오징어 같은 놀이는 생소하기만 할 거다. 놀고 싶어도 또래가 별로 없고, 있다고 해도 다들 학원을 가거나 과외를 받느라 동네 어귀는 쓸쓸하다. 적어도 오프라인에서 아이들 놀이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있다. 일부 놀이들도 어른들에 휩쓸려 그들만의 문화는 종적을 감추고 있다.


그런 와중에 컴퓨터 게임이 사회적 문제라는 인식이 대두되고 있다. 게임 중독이란 말도 심심치 않게 언론에 오르내린다. 과연 컴퓨터 게임은 아이들을 위협하는 존재일까?


간단히 말해 컴퓨터 게임은 지금의 아이들이 즐기는 놀이 중에 가장 안전한 게임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예전에는 아이들 부상의 제1원인이 놀이(게임)이었지만 컴퓨터 게임 때문에 아이들이 다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뉴스에서는 심심치 않게 게임 중독으로 인한 사망, 절도, 사기, 살인 등의 사건사고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게임 중독에 대한 규제의 목소리가 높다. 만일 그러한 강력사건들이 게임 중독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면 당연히 법과 제도로 게임을 규제하고 제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또 다른 중독도 많다. 많은 직장인들이 주말이나 휴일도 없이 열정적으로 일하다가 돌연사하는 일이 비일비재다. 워커홀릭이란 말도 생겼다. 아무래도 일에 중독된 사람들이 너무나 많으니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는 사람과 직장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겠다. 많은 학생들이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공부하다가 우울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려 자살을 하고 있다. 공부가 사망의 원인이니 규제해야 마땅하다. 많은 산모들이 아이를 출산한 후 양육 스트레스로 인한 과로로 우울증에 시달려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심지어 자녀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따라서 출산을 제한하고 규제하는 법안이 필요하겠다.


물론 엉뚱한 논리다. 우리가 어떤 단어에 ‘중독’을 붙이는 것은 그것이 필연적인 결과로 나타나는 증상들이 신체나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직접적으로 끼쳤을 때 표현할 수 있는 말이다. 일하는 사람들 중에 과로사가 나온다고 일을 규제하지 않고, 산모 중에 우울증이 심하다고 해서 출산을 제한하는 법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게임 역시 일부에서 나타나는 부작용만으로 게임 을 규제한다는 것은 일면 필요한 부분이 없지 않으나 너무 쉽게 이야기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게임을 부정적으로만 보려는 시각과 게임에 대한 몰이해가 깊게 깔려 있다. 그토록 ‘게임 중독’에 대해 수많은 미디어들이 강력한 경고를 보냈지만 게임과 범죄를 직접적으로 연관 지을 수 있는 어떠한 연구 결과도 발표된 바가 없다는 점이 이를 시사한다. 지금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사고의 원인을 가난, 소외, 따돌림, 과도한 스트레스  등으로 대처해 보라. 오히려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게임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가 사회적으로 퍼져 있을까. 그것은 사회를 주도하는 어른들 대부분이 게임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우리 때는 저러지 않았는데, 요즘 젊은 것(혹은 어린 것)들은... 쯔쯔쯧”이라는 말로 쉽게 치부해 버린다. 일면 그런 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다. 게이머들을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습일 수도 있다. 아마 대부분의 부모들이 아이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에 몰두한 모습을 보면서 기겁을 하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평소에는 똘똘하고 부모말 잘 듣는 아이가 컴퓨터 앞에 앉으면 입을 벌리고 정신없이 키보드와 마우스를 난타하며 혼잣말을 하는 모습은 이상하게 보일만하다. 그러나 그것은 집중하고 있는 모습일 뿐이다. 어른들이 고스톱이나 윷놀이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저 아이들이라서 더욱 이상하게 보는 것일 뿐이다. 무언가에 몰입하고 집중하고 극한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때의 표정, 쉽게 말해 어른들이 섹스를 할 때의 표정도 그와 같지 않나.


스타크래프트의 정식버전은 18세 이상 가능이지만 그보다 수위가 낮은 12세 버전도 시중에 나와 있다.


본인이 유일하게 즐기는 월드오브워크래프트는 15세 이상 할 수 있는 게임이다.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21세기이며 아이들은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 부모가 아이들이 게임을 즐기는 것을 그저 스트레스나 풀겠거니 하며 방치하거나 ‘게임은 나쁜 것’이라고 하면서 죄책감을 준다면, 아이들은 게임을 통해 스트레스와 폭력성을 키울 것이고, 죄책감을 털어내기 위해서 더욱 더 게임을 통한 일탈과 반항을 생각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게임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이들이 즐겨 하는 게임의 장점을 이해하고 그 게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즐기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스타크래프트가 가진 전략성을 통해 종합적인 사고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월드워크래프트 속의 신화와 전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구성해 보자.


“아들, 밀려오는 저글링 러쉬를 깨려면 시즈 탱크를 언덕 위에 배치하는게 좋아.”

“아무래도 언덕 탱크를 공략하기 위해서 공중 공격을 해오겠죠?”

“그렇지, 그렇다면 터렛(대공미사일 기지)을 설치해서 방공 능력을 보강하는 건 어때?”


“아빠, 드워프들은 왜 키가 작고 뚱뚱하죠?”

“드워프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인간보다 작은 난장이란다. 어두운 곳을 좋아하고 땅굴이나 동굴에 모여 사는 종족이지.”

“아, 그래서 채굴에 능하다는 거군요.”


아이들의 게임을 규제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단순히 게임 시간을 통제하는 것만으로 가정이나 학교에서 할 일을 다한 것이 아니다. 교육의 진실은 수평적인 대화를 통한 이해와 공감에 있다. 게임을 즐기는 아이와 대화하고 그 게임을 이해하려고 하자. 얼마나 편한가, 만일 아이가 다방구나 술래잡기, 오징어를 하자고 했다면 아마도 당신은 부상의 위험이나 심신의 피로를 경험할 텐데, 고작 컴퓨터 게임 아닌가? 설마 클릭과 키보드 조작이 힘들다고 핑계될 것인가? 물론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게임에 대해서는 단호히 못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만 모든 게임이 그렇지는 않으며 아이들이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게임이 많다. 아이와 대화를 하기 위해서 함께 게임을 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겉으로 이해하는 척하는 것과 함께 몰입하고 즐기는 것은 천지 차이다. 부모가 함께 게임을 즐기고, 게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 아이들이 게임 안으로 숨어 들어 게임 속에서 방황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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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 관련기사 바로 가기

한 젊은 여성 작가 최고은 씨가 남긴 마지막 유서 같은 쪽지입니다. 트위터에서도 최고은 씨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이 지금도 조용한 물결을 이루며 퍼지고 있습니다. 불공정한 영화계 관행이 또다시 도마에 올랐네요. 그러나 영화계만 그럴까요. 출판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과서 출판물의 경우 합격 불합격에 따라 출판노동자들의 목숨이 왔다갔다 합니다. 책의 실패에 직접적 책임이 있을 교수 등의 저자는 이미 선인세라는 명목으로 기대 이상의 고료를 챙기고 다음 교과서 시즌이 되면 다시 아무일 없다는 듯 저자로 이름을 올립니다. 많은 편집 노동자들은 심의에서 탈락했다는 이유만으로 회사를 떠나고, 고통의 시절을 보내다가 다시 저임금의 아웃소싱 출판 시장이나 별로 나을 것 없는 타사에 좋지 않은 조건으로 재취업하게 됩니다.

고 최고은 씨의 일이나 출판노동자들의 현실은 영화사나 출판사가 떠 안아야 할 손해를 온전히 최하층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전형적인 사례이며, 이런 일은 우리 사회에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죠. IMF가 그러했고 최근의 외환 위기 사태가 그러했으며, 전세 대란과 물가 폭등으로 이어지는 지금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부자들의 위기를 떠넘기는 것일 뿐이죠. 우리 사회는 계급 사회입니다. 그리고 그 계급에서 돈이 있는 사람들이 힘을 가진 사회입니다. 사회 지도층의 선행 따위를 기대하기 힘든, 혹여 있다고 하더라도 더 많은 악행을 감추기 위한 장치일 뿐인 그런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연대해야 합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두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여기저기서 거대한 힘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보내야 합니다. 이명박 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실제로 고통받고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지지하고 관심을 가지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이웃들의 문을 두들겨 봅시다.

고 최고은 씨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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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에게 보낸 트위터 메시지였다. 후배 @choan2 는 3주간 출장을 떠나는 아내를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와 텅 비어 있는 집안의 모습을 보며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트위터에 띄웠다.



그의 메시지를 보며, 남다른 인연으로 살아가는 후배 부부의 모습이 좋아 격려의 메시지를 남겼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시간은 참 빨리 간다. 나도 벌써 결혼 4년차로 접어들었다. 아기가 태어났고 전세 계약이 끝나가고, 어머니 환갑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10분의 1을 아내와 같이 보내고 있다. 짧으면 짧고 길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 작년 봄, 아내는 잠시 구례에 계시는 장모님 댁에서 몸을 의탁한 일이 있다. 해산 이후 조금은 무리한 듯해서 기왕이면 마음 편하게 어머니 집에서 봄을 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합의하에 이뤄진 일이었다. 불과 한달도 안되는 시간이었는데도, 아내가 떠난 자리는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더랬다. 한동안 아내가 쓸고 닦았을 방구석과 음식을 하고 설겆이를 했던 싱크대를 우두커니 바라볼 때가 있었다. 함께 생활했던 공간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을 때의 느낌. 내가 바쁘다고 늦게 오거나 외박을 했을 때 아내가 느꼈을 그런 마음들이 오롯이 가슴을 때렸다.

애틋한 마음이 자리잡자 그리움이 깊어갔다. 결국 2주만에 차를 몰고 구례까지 5시간여를 달려 내려갔다가 오기도 했다. 가끔, 아니 아주 자주, 결혼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그리움 애틋함을 선물해 준 사람이 내 곁에서 항상 나를 지켜주고 나를 아껴주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지난 겨울부터 지금까지 내내 야근과 주말 특근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적은 요즘, 아내는 무척 힘들어한다. 강추위도 한몫하고 있지만,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공간과 시간의 절대부족이 큰 원인이라고 본다. 이번 일이 끝나면 봄이 올 것이다. 다시 우리들의 화양연화를 그려 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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