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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통

아내 덕분에 도시락을 가지고 다닌다. 이른 아침 정갈하게 반찬을 담는 아내의 손길을 보면 하루의 시작부터 행복이 가득하다. 도시락에 담기는 정성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도시락을 다시 싸게 된 게 얼마만일까.

초등학교 때는 도시락을 놓고 등교한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학교까지 찾아오신 적도 있다. 집안 사정을 모르지 않아 반찬 투정은 생각도 못 했지만, 그래도 정성들여서 싸주신 밥 위에 잘 부쳐진 계란 프라이가 올라가 있으면 행복했다. 겨울철에는 교실 한 가운데 있는 둥글고 못생긴 난로에는 항상 양철도시락들이 겹겹이 쌓여 있고, 주변에 보온도시락들이 곁불을 쬐고 있곤 했고, 간혹 불이 너무 세서 밥 타는 냄새가 교실에 진동하면 한바탕 난리가 나기도 했다.

다시 도시락을 싸게 된 건, 경제적인 문제도 있지만 건강과 환경을 생각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아내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면 직접 김치에 밥, 그리고 계란 프라이 정도로 간편하게 싸고 다닐 작정도 했다. 그만큼 도시락은 선택이라기보다 나와의 약속이었던 것이다.

이런 약속을 한 데는 바깥에서 먹는 밥의 양과 영양적 불균형 문제가 한몫했다. 도시락을 싸면서 점심 식사의 양이 많이 줄었다. 게다가 아내가 식단을 약간 싱겁게 꾸미고 있어서 짜고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 식당의 음식보다 간결하고 부담이 덜하다. 도시락의 크기도 예전에 비해 많이 작아졌다. 그렇다고 영양 섭취 기준에 부족한 것도 아니다. 밥은 콩, 팥, 검은쌀, 보리 등등 다양한 잡곡들이 들어간 영양밥이다. 무엇보다 여러 직원들이 도시락을 싸오다 보니 다양한 음식들을 골라서 먹을 수 있어서 반찬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다.

2008년 11월 취업포털 커리어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직장인 1671명 중 31.3%가 경기불황으로 점심식사 해결 방법을 바꿨다고 응답했고, 그 중 39.2%가 ‘도시락을 싸온다’고 응답했다. 설문조사가 있던 작년에 비해 요즘의 경기는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서민경제는 여전히 어려운 현실을 감안하면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내가 다니는 직장의 같은 층에 있는 직원들 중에는 매일 6~8명이 항상 도시락을 가지고 온다. 우리가 근무하는 층의 전체 직원 숫자가 19명 정도이니 도시락족이 적지 않은 셈이다.

그렇다면 도시락을 통한 경제적 이익은 얼마나 될까. 이전까지 내가 3500원짜리 구내식당 밥을 먹어 왔고, 일주일 5회에 한달 4주로 계산하면, 3500원×5회×4주=70000원이니 한 달에 70000원 정도의 점심값을 절약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금액이 일 년이면 90만원에 육박한다. 작은 돈이 아니다.

물론 이 글은 당신에게 도시락을 싸라고 권유하는 게 아니다. 추억 속에 있어야 할 도시락이 다시 내 삶에 찾아온 것은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 도시락이 다시 등장한 데는 다시 찾아온 불황의 그늘이 드리워졌다는 걸 말하고 싶다. 여기에 식재료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또 크게 한몫했다. 도시락의 등장 배경에는 가난에 대한 불안과 건강에 대한 불만, 사회에 대한 불평이 드리워져 있다. 내가 오늘 먹은 도시락은 분명 사랑과 낭만의 도시락이지만, 이 도시락에 얽혀 있는 사회 현상의 그늘은 그리 유쾌하지 않은 게 지금의 현실이다. 그래도 어느 밥을 먹든 건강하고 즐겁게 먹자. 당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쌀 한 톨에 담긴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게 도시락이든, 식당 밥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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