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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랬듯이 올해도 국어 수능 문제를 차분히 앉아서 풀어보았습니다. 매번 느끼지만, 국어 문제는 정말 오묘해요. 수능 문제 출제자들의 고민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이어지는지가 눈에 보입니다. 수능 출제자들은, 교묘한 사냥꾼처럼 괜히 문장을 어렵게 꼬거나 쓸데없이 함정을 파 아이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집중력과 인내심을 가지고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아이들에게 궁극의 희열을 맛보게 하는 선물을 준비하는 사람들 같습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며 어깨를 두들기면서 이것이 진짜 공부의 희열임을 알게 해 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어요. 

 

지문은 예년에 비해 좀 쉬운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문을 보고 문제를 풀어가는 식의 단순한 유형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또 다른 지문을 내 주고 비교분석하거나 추론하는 형식의 유형들이 눈에 띕니다. 물론 이런 유형의 문제가 처음은 아니지만 무언가 다른 느낌이었어요. 수능 해설가들은 새로운 유형의 문제들이 나타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조금더 복잡한 사고와 논리적 접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특히 2020교육과정에서 그동안 강조해 온 융합적 사고와 문제 해결력을 필요로 하는 문제를 만들어 낸 것 같다고도 말했습니다. 

 

제가 항상 힘들게 풀었던 고전이나 문법(편집자가 문법이 어렵냐고 묻는다면···· 할말은 없지만 고등 국어의 학술적 문법은 교정교열에서 일반적으로 보는 문법보다 많이 어렵습니다.)에서는 좋은 성적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산업기술 관련 지문에서는 여러 함정에 순차적으로 빠져버리면서 잘못된 답을 내놓았다. 특히 3D 애니메이션의 랜더링과 모델링에 대한 설명에서는 지문의 내용과 보기의 내용을 연관지어서 풀어야 하는 문제들이 많았는데, 집중력 부족으로 놓치게 된 경우가 많았죠. 

 

현대소설 장르에서는 서영은 작가의 <사막을 건너는 법>이라는 소설 지문이 나왔는데, 오랜만에 감각적 지문과 함께 문제를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현대시에서는 이용악의 <그리움>과 이시영의 <마음이 고향2 - 그 언덕>이 나왔어요. 수능 문제풀이의 가장 큰 즐거움은 이처럼 서로 다른 두 시를 깊이 있게 읽어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가슴 뛰는 순간이죠. 문제 풀이가 귀찮은 분이라면 수능에 나온 이 두 시를 한번 읽어보고 시에 담겨 있는 공통적인 정서 혹은 차이를 음미해 보셨으면 합니다.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은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 이용악, <그리움>




왜 그곳이 자꾸 안 잊히는지 몰라
가름젱이 사래 긴 우리 밭 그 건너의 논실 이센 밭
가장자리에 키 작은 탱자 울타리가 쳐진.
훗날 나 중학생이 되어
아침마다 콩밭 이슬을 무릎으로 적시며
그곳을 지나다녔지
수수알이 꽝꽝 여무는 가을이었을까
깨꽃이 하얗게 부서지는 햇빛 밝은 여름날이었을까
아랫냇가 굽이치던 물길이 옆구리를 들이받아
벌건 황토가 드러난 그곳
허리 굵은 논실댁과 그의 딸 영자 영숙이 순임이가
밭 사이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커다란 웃음들을 웃고
나 그 아래 냇가에 소고삐를 풀어놓고
어항을 놓고 있었던가 가재를 쫓고 있었던가
나를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솨르르 솨르르 무엇이 물살을 헤짓는 소리 같기도 하여
고개를 들면 아, 청청히 푸르던 하늘
갑자기 무섬증이 들어 언덕 위로 달려 오르면
들꽃 싸아한 향기 속에 두런두런 논실댁의 목소리와
까르르 까르르 밭 가장자리로 울려퍼지던
영자 영숙이 순임이의 청랑한 웃음소리
나 그곳에 오래 앉아
푸른 하늘 아래 가을 들이 또랑또랑 익는 냄새며
잔돌에 호미 달그락거리는 소리들었다
왜 그곳이 자꾸 안 잊히는지 몰라
소를 몰고 돌아오다가
혹은 객지로 나가다가 들어오다가
무엇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나 오래 그곳에 서 있곤 했다

                - 이시영, <마음의 고향2 - 그 언덕>

 

>>> 수능 기출 문제 다운로드 

 

기출문제 -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대학수학능력시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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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suneung.re.kr

 

올해 필적 확인 문구는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대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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