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혐오를 앞세워 갈라치기 하는 세력과 분노와 공포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세력의 싸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가 가진 공통점이다.
대선 기간 중 양측은 총칼만 안 들었을 뿐, 말로 오가는 증오의 표현들은 총칼 못지 않았다. 이렇게 비이성적인 난투극으로 대선을 치루는 건 이제 그만했으면 싶은 마음인데, 과연 그런 게 가능해질까?
상대를 상대로 이해하지 않고, 전부 몰살하고 절멸해야할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양쪽 다 있더라. 그런 사람들에게 먹이(관심)를 주는 사람도 많다. 생각을 하면서 살지 않으면 그냥 사는 대로 생각하는 바보가 된 사람들이다.
이재명이든 윤석렬이든 대통령 후보까지 올라왔으면 그만한 시대적 요구가 반영된 것인데 그걸 보지 않고 어떻게든 흠결만 잡고 늘어졌다면 스스로의 정신건강을 좀 의심해 보시길 바란다. 검증? 검증이 선을 넘으면 그냥 확증편향의 사고일 뿐이고, 음모론일 뿐이다. 음모론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만한 사람들도 열심히 음모론을 전파하는 것을 보면 누구말대로 선거가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 극단적 대립만 불러오는 지금의 정치 체제는 바뀌어야 한다. 민주당은 지금이라도 이런 극단적이고 비이성적 광기만을 불러오는 정치 체제를 개혁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유권자들이 '모 아니면 도'만 선택할 수밖에 없게 만들고, 승자가 모든 걸 독식하는 선거 제도를 바꾸지 않고서는 건강한 민주주의를 만들어 갈 수 없다.
윤석열 당선자도 정치의 극단적 모습을 아주 생생히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국민들의 요구가 민주당 아니면 국민의 힘 두 가지 선택지로만 선택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또록 정치의 자장 안에서 협력하고 논쟁하는 모습을 보일 때 민주주의는 한단계 더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다.
윤 당선자는 정권 교체를 모토로 내세웠다. 바라건대, 정권 교체를 넘어 정치 교체를 추진하는 지도자가 되어 주길 바란다.
막판 정치 교체를 전면에 내세워 표를 받은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매번 위기의 순간에만 정치 교체를 내세워 구걸하지 말고 다수당의 지도력을 발휘해 윤석열 당선자와 정치적 대협상에 나서야 한다.
더 강력한 민주주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주인된 삶을 살 수 있게 돕는다. 주인된 사람들의 의식이 모일수록 민주주의는 더 강해질 수 있다. 여전히 대한민국은 이런 선순환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극단적 대립을 보였던 대선이었지만 그래도 여러 모습들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사람의 생각은 말과 글로 전달된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대화를 하듯이, 많은 이에게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글이 필요하다. 여러 권력자들이 자신의 독재 권력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반대자들의 말과 글을 차단했다. 때로는 죽음으로, 때로는 금서라는 형식으로····
중세 시대 고대 인문학 관련 서적들은 이교도의 사상이라는 이유로 종교적 권력 아래 대중에게서 격리되었다. 격리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시간의 무차별적인 공격 앞에 속절없이 사라져 갔던 고대 문헌들을 기어이 끄집어 내어 세상앞에 내놓았던 사람들이 있다. 이 책 <1417 근대의 탄생>은 그런 사람 중의 한 명인 포조 브라촐리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포조는 중세의 기독교 권력의 몰락해 가던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보았던 로마 교황청 서기이기도 했고, 인문학과 과학 부흥을 기뻐하고 적극적으로 고대 서적 발굴에 앞장섰던 인문학자이기도 했다. 어느 시대나 경계인이 가졌던 모순을 모두 가진 인물이었고, 생각과 사상도 어느 하나로 대변하기 어려운 다양성을 갖고 있던 인물이다. 그런 경계인이었던 포조가 르네상스의 시기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 책은 중세의 몰락과 르네상스의 시작점에 있던 한 인물-포조 브라촐리니-이 독일의 오래된 수도원에서 발견한 책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의미를 쫓아가는 내용이다.
2천년 전에 쓰인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기원전 1세기 고대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철학 서사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핵심적 내용들은 더 거슬러 올라 기원전 4세기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다다른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무엇이 좋고 악한지는 쾌락과 고통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고, 가장 좋은 쾌락은 지적 탐구에서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죽음은 몸과 영혼의 종말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신은 인간을 벌주거나 보상하는데 관심이 없고, 우주는 무한하고 영원하며,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궁극적으로 빈 공간을 움직이는 원자들의 움직임과 상호 작용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4세기의 이런 주장들은 지금 돌아보아도 매우 놀랍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고 있고, 신이 인간사에 개입하여 상과 벌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상은 신의 권능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성직자들이 있던 중세에서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다. 아니 중세 유럽만이 아니라 태양계 바깥까지 우주선을 보내고 있는 현재도 일부 종교인들이 들으면 펄쩍 뛸만한 무신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물론 세상에 영원한 진리는 없을 것이다. 먼 훗날 어떤 과학적 발견이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지도 모르고,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인류가 이루어 낸 과학적 철학적 사실들로 본다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루크레티우스의 서사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중심으로 저자는 14세기 유럽의 과학적 발견, 종교적 갈등, 철학적 성찰 등을 꼼꼼한 고증 자료와 함께 엮었다. 하나의 사건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유추해 내는 힘은 단순한 상상상력을 넘어 치밀한 고증이 있을 때 더 빛이 난다.
교황청 서기였고 피렌체의 총리까지 지냈으며 탁월한 책 사냥꾼이었던 인문학자 포조의 기록과 그가 다른 학자들과 어울렸던 편지들, 그의 행적을 정리한 기록물들을 중심으로 보다 역동적인 시대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종교재판의 잔혹함과 비이성적 광기, 당시 고위 성직자들의 위선과 타락을 포조의 글과 기록을 통해 보면, 가장 어두울 때 빛나는 작은 불씨들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은 어떤 동물보다 추상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며 이것이 인류가 사회성을 갖고 지금까지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인류의 상상력은 신에 대한 공포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나면서 진실을 외면하고 진리에 대한 성찰을 가로막았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인간에게 관심이 없을 거라는 오래된 진실이 21세기를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 받고 있는 현실은 참 아이러니하다.
<장미의 이름>과 <1417 근대의 탄생>
중세시대 가장 불온했다는 책이 가장 빛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분노와 공포로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고 그들이 생명과 재산을 갈취하던 권력이 과학의 발전과 인문학적 사상에 밀려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1417 근대의 탄생>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떠올리게 했다. <장미의 이름>은 어느 수도원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이 살인은 광신도였던 늙은 수도승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리를 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는 수도사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죽음을 신을 배신한 자들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위장하여 공포를 조장하려는 음모였다. <장미의 이름>은 이미 부패할대로 부패했던 당시 기독교 권력의 모습과 함께 분노와 공포로 대중을 지배하려던 성직자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 작품이다.
두 책은 모두 중세 시대의 종교 권력이 무너지는 과정과 함께 고대 문헌이 가져온 충격이 당시의 성직자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보여 준 책이다. <1417 근대의 탄생>은 실제 당시 사람들의 활동과 기록을 통해 탐사 보도 형식으로 사실을 전달했다면 <장미의 이름>은 살인사건을 쫓는 수도사의 이야기로 당시의 광기를 고발하고 있다. <1417 근대의 탄생>이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철학과 사상이 르네상스 시기와 인문학과 과학과 만나는 지점에 좀더 집중했다면, <장미의 이름>은 중세 기독교의 타락과 비이성에 더 집중했다.
<장미의 이름>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세상이 바뀌는 과정의 이야기에 좀더 흥미를 갖고 <1417 근대의 탄생>을 읽기를 추천한다.
투표권이 생긴 이래 대통령 선거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었다. 직접적인 선거 활동을 한 경우도 있었고, 간접적인 지지-반대 발언을 온라인 공간에서 펼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대선은 말 꺼내기가 쉽지 않다. 줄곧 지지했던 민주당에 표를 주기가 어렵다.
민주당에 대한 불신이 생긴 건 서울과 부산시장에 후보를 냈을 때부터다. 그때 민주당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말로만 반성하는 관행, 서민을 위한 정책 실종,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신, 민중을 외면하는 나라 살림...
무엇보다 변하지 않은 공포와 분노 마케팅. 언제까지 보수세력에 대한 반대 이익만 취득하며 살 건가? 이런 이유로 당연히 민주당은 이제 심판의 주역이 아닌 대상이 되고 말았다.
누군가는 가스라이팅이라고 한다. 우리가 더 지지해 주지 않아서... 우리가 더 밀어주지 않아서... 우리가 더 열심히 응원하지 않아서... 한국 사회가 뒤로 가는 열차에 올라탄 것일까? 마치 "나에게 표를 안주면 국힘당이 되는데, 그래도 좋아?"라며 사람들을 길들여 왔고, 그렇게 몸집을 키워오더니 이제 스스로 괴물이 되고 말았다. 민주당은 사람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당연히 국힘당 윤석렬은 최악의 후보다. 그런데 그 최악의 후보와 민주당은 졸전을 치르고 있다. 역시 민주당 주변인들은 최악의 후보를 막아야 한다며 표를 달라고 한다.
물론 윤석렬에 비해 이재명 후보는 좋은 후보다. 대장동 의혹도 부풀려진거라는데 동의하며 그의 성품이 좀 모질고 막가는 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선택받았다는 것은 그것을 상쇄할만한 그의 장점이 더 크다는 반증이다. 그런데 민주당도 그러한가?
나에게 "윤석렬을 막기 위해 이재명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은 오히려 더더욱 나를 망설이게 한다. 민주당은 언제까지 국힘당의 반대파로만 살려고 하나? 결국 국힘당과의 적대적 공존으로 생명을 유지하겠다는 거 아닌가? 마치 남북의 보수 세력들이 분단체제를 이용해 온 것처럼 말이다.
허상과 꿈을 쫓는 일이 되겠지만, 그냥 이 땅이 일궈온 민주주의를 믿기로 했다. 어떤 세력도 어떤 권력도 민주주의의 시스템에서 권력은 제한적일 것이다. 이재명이든 윤석렬이든 그들 역시 이 제도의 틀 안에서 움직여야 할 것이다. 적어도 이번 선거는 이 지겨운 가스라이팅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동안 해왔듯이 다시 민주당에 표를 준다면 민주당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땅의 대통령 선거는 승자독식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변화와 민주주의의 승리를 꿈꾸는 나는 이번 선거의 목표를 민주당 심판과 양당체제의 균열에 두겠다. 아마도 이 기조는 민주당이 다당제 정착 및 결선투표제 실천이 없다면 계속 이어질 것이다.
더이상 공포와 분노 마케팅으로 표를 구걸하지 마시라. 새로운 미래를 보여주겠다면 평소의 행동으로 보여달라. 매번 이렇게 선거 때만 하겠다고 하지 말고말이다.
얼마전 초등 6학년 딸이 '눈뜨고 코 베이징'이라며 이번 쇼트트랙 판정 논란 관련 유튜브를 보내왔다. 매번 개나 고양이, 아니면 노래 영상만 보내오던 녀석이 이런 영상도 보내오는 걸 보면 그 또래 아이들에게도 꽤 많은 관심을 받는 사건인가보다. 어찌됐든 올림픽에 전혀 관심없던 초딩들도 올림픽을 알게 하다니 실로 놀라운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결국 아이들에게 올림픽이 부정, 부패, 싸움, 욕심으로만 기억된다면 그 후유증은 어떻게 감당할까? 그래서 어제 저녁에는 아이와 함께 스포츠가 가지는 의미, 친구들과 즐기는 게임과 다를 바 없는 스포츠의 정신을 이야기해 보았다.
우리나라는 쇼트트랙이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이후 절반에 가까운 금메달을 가져간 쇼트트랙 강국이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방법으로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쇼트트랙은 스피드스케이팅과 달리 변수가 아주 많은 경기이다. 즉, 억울한 일도 생기고 논란도 많은 종목인 것이다. 오노 사건 기억하는가? 하지만 안톤 오노 선수는 쇼트트랙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한 선수 중 한명이었다. 국뽕 기사와 반중 정서에 취해 쇼트트랙에 대해 잘 모르던 사람들까지 흥분하는 걸 보면서 이건 아니지 않나 싶다. (참고 칼럼: 한발짝 물러서 본 '쇼트트랙 논란'[김세훈의 스포츠IN]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토니 스타크는 고립된 우주선 안에서 네뷸라와 손가락 농구게임을 한다. 네뷸라는 패배했을 때 흥분해 칼을 들지만 토니는 패배해도 좋은 게임이었다며 악수를 청했다. 스포츠는 서로의 열정과 노력에 대해 응원하고 격려하며 즐기는 것이다. 괜히 비분강개하여 쓸데없이 에너지 낭비하지 말자. 그럴바에는 그냥 발닦고 드라마나 보자. 비록 여러 이유로 선수들은 실패한다. 한명의 우승자가 있다면 그 몇십배의 패배자가 있다. 중요한 것은 대부분이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더 멋진 일 아닌가? 승리는 위대하지만 승리만 보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
열심히 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선수들의 활약을 보시길 바란다.
실로 오랜만에 자전거 펑크를 때워야 했다. 자전거 뒷바퀴가 펑크난 건 벌써 3주 정도된 것 같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전거 펑크를 방치해 놓고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자전거를 잘 타지 않기 때문. 아무튼 펑크난 자전거를 끌고 반나절을 보냈다. 이곳저곳에 들려보아도 자전거 펑크만 때우는 일은 이제 하지 않는다. 노고 대비 비용이 너무 적기 때문일 거다. 오래전 5000원 정도면 펑크를 때울 수 있었다. 내심 15000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결국 13000원을 주고 튜브를 교체해 주었다.
그럴만하다. 펑크를 때우는 일은 튜브를 교체하는 일에 비해 더 많은 노동력이 들어간다. 아무래도 펑크의 원인 파악을 해야 하며, 펑크난 위치를 정확히 찾아야 하는 것 때문이다. 그러니 튜브 자체를 교체하는 일이 훨씬 더 쉽고 간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자전거 타이어의 튜브는 가격이 매우 저렴하니 가능한 일이다. 튜브 자체의 가격이 비싸다면 이뤄지기 어려웠을 거다. 자전거 수리나 정비와 관련한 공식 공임비는 인터넷에 찾아보면 나온다. 그러나 거기에도 이제는 타이어 펑크 수리 관련 항목은 보이지 않는다. 튜브 교체 비용만 나온다.
펑크 패치를 이용해 기존 튜브의 펑크를 때우던 방식이 이젠 튜브 자체를 교체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전에 비해 자원의 소모는 더 커진 셈이다. 사람의 노고에 대한 가치를 더 높게 쳐주면서 벌어진 일이지만 적당한 공임비를 주는 방식이 아닌 생산품의 구매를 통해 이뤄지는 서비스 방식이 된 것이다.
높아진 자본주의적 생산이 가진 모순의 하나 아닌가. 튜브의 생산 비용이 턱없이 낮아지고, 임금의 가치는 계속 높아지면서 작은 조각으로 타이어 튜브의 펑크를 때우는 비용보다 아예 튜브 전체를 교체하는 비용이 더 효율적(비용)이 된 세상이다.
이런 현상은 가전제품에서도 잘 나타난다. 보통 냉장고의 수명이 10년 이상인데, 그 냉장고가 이상이 생겼을 때 수리하려면 수리비와 부품교체비(냉장고 수명이 길어지면서 해당 부품이 없거나 구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수리에 필요한 기간 등등의 문제로 아예 냉장고를 교체하는 게 더 경제적(?)이라는 말이 있다. (가전제품별 교체주기는···고장난 냉장고 '고쳐 써? 새로 사?')
고쳐쓰고 아껴쓰는 건 이제 옛말이 되는 걸까? 내가 세상이 바뀌는 것에 조금씩 뒤쳐지는 걸까? 아껴쓰는 건 어찌어찌 해 보아도 고쳐쓰는 일은 이제 쉽지 않다. 아니 아껴쓰는 것도 어리석은 일일지도. 세상은 지금, 이 시간을 잘 즐기라고 한다. 아끼지 말고, 마음껏! 물건도 아끼지 말고 지금 당장 사고 사용하고 즐겨야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물건의 가치보다 경험의 가치가 더 중하다. 세상은 더 좋아진 것일까? 그 많은 물건들은 금방 쓰레기가 되고 지구 환경에 더 악영향을 줄텐데 그건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결국 소비를 줄이는 것이 지구 환경에 더 유익하다. 그러나 소비를 줄이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덜 산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경험의 폭을 좁히고, 더 작은 공간과 더 단순한 생활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것이 될 것이다. 감당할 수 있을까?
소금산 출렁다리 앞 소금산 출렁다리 앞 포토존 울렁다리로 가는 길에서 바라본 협곡의 모습. 멀리 보이는 다리가 울렁다리이다. 소금산 울렁다리. 출렁다리를 지나 한 20여분 가면 도착한다. 여기로 가는 길도 아찔함을 맛볼 수 있다. 울렁다리는 바닥이 유리인 구간이 있다. 바닥을 바라보며 그 위로 걷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소금산 출렁다리는 원주의 간현광광지 안에 있다. 날이 풀리면 줄서서 건너야 한다고 하는데, 새벽에 출발한 덕분인지 그나마 좀 한산했다. 다만 내려올 때에는 주차장도 거의 가득 찼고사람들이 오르는 인파도 제법 많았다. 만일 출렁다리를 여유롭게 즐기고 싶다면 이른 아침에 오르는 게 좋을 듯하다.
소금산 계곡에서는 포크레인을 비롯한 중장비들이 관광지 개발 공사에 한창이었다. 관광지에 차를 주차하고 식당을 찾아 식사를 먼저 했다. 아침부터 막걸리를 한 사발 돌리는 것도 아저씨 여행의 꿀맛이다. 소금산 출렁다리 입장권은 1인당 3000원. 하지만 2000원을 원주 사랑 상품권으로 돌려 준다. 원주시 식당이나 시장 등에서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나중에 원주 전통 시장에서 장을 보면서 상품권을 사용했다.
관광지 입구에서 출렁다리까지는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물론 나무계단으로 잘 정비되어 있어 어렵지 않지만 다리가 불편한 분들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잘 걷는 사람은 20여분 정도 부지런히 올라가면 다리 초입에 닿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쉬엄쉬엄 올라가면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출렁다리의 길이는 200m. 길이도 길이지만 협곡을 잇는 높이가 남다르다. 자그마치 100m높이에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100m 상공을 흔들리면서 걸어보는 느낌은 제법 짜릿하다.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더 흔들릴까?
출렁다리를 지나 최근에 개통된 울렁다리로 이동했다. 울렁다리로 향하는 길에서도 놀라움이 계속된다. 절벽에 심을 받고 거기에 받침을 얹어서 길을 만들었다. 사실상 산길이 아니라 절벽 옆길을 타고 이동하는 셈이다. 인간의 기술력에 다시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다. 울렁다리는 출렁다리보다 길고(353m) 높이도 더 높다(200m). 중간에 유리 바닥을 만들어 아찔한 느낌을 더해주었다. 그래도 다리 밑을 보기 보다 다리 중간에서 건너편 소금산 협곡의 절경은 꼭 눈에 담고 가자.
2000년대 들어오면서 이곳 출렁다리를 비롯해 여러 지자체들이 앞다투며 관광지 현수교 제작에 매달리고 있다. 원주 소금산 출렁다리를 비롯해, 울산 대왕암 출렁다리(303m), 충남 논산 탑정호 출렁다리(600m), 충남 예산 예당호 출렁다리(402m), 전북 순창 체계산 출렁다리(270m 높이90m), 충북 제천 청풍호 옥순봉 출렁다리(222m) 등등... 대충 인터넷에 '출렁다리'라고 검색하면 쏟아져 나온다. 산업 발전의 성과는 오래 걸리기 마련이지만, 이런 토목 사업을 통한 관광지 개발은 금방 눈에 띈다. 성과 위주 보여주기식 개발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물론 문화 산업의 측면에서 필요한 일이긴 할 거다. 그러나 미래의 먹거리 개발을 위해서는 지역의 지도자라면 보다 높고 큰 혜안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출렁다리가 만일 찾아오는 관광객이 줄어 관리비만 먹는 하마가 되어 관리 인력과 재정이 줄어들었다가 큰 사고로 이어진다면 누가 책임질까? 성장만을 염두하는 개발이 갖는 한계다.
박경리 문학공원 내 전시관에 있는 시.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 교통사고로 잃은 후 쓴 시. 온갖 고통을 글로써 극복하려는 사마천의 모습에서 자신을 보았던 것일까. 박경리 문학의 집 전시실에 마련된 전시물이다. 대하소설 &amp;lt;토지&amp;gt;의 주요 장면들의 내용을 펼쳐 놓고 사건에 관계된 여러 장치들로 실감있게 나타내 주었다. 텍스트와 책, 사물을 통해 전시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박경리 선생의 동상. 편안한 얼굴로 어느 한 곳을 지그시 응시하는 선생의 모습에서 &amp;lt;토지&amp;gt;의 마지막 부분을 집필하던 그이의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박경리 문학공원에도 들렸다. 2010년이었던가, 2011년이었던가. 아이가 2살일 때 안고 돌아다녔던 걸로 기억되는 곳이다. 그때도 이곳에 들렸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전시관의 모습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때로는 그렇게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에 안심한다. 벌써 10년이 훌쩍 넘은 시간인데도, 박경리 선생은 저 돌 위에 변함없이 한쪽 팔을 대고 기댄채 앉아 있다. '잘 지내셨어요?' 마음으로 재회의 인사를 나누니 편안해진다.
이곳은 선생께서 편안하게 말년을 보내며 대하 장편 소설 <토지>의 마지막 4부와 5부를 집필하고 완결지었던 곳이었다.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힘들게 자식을 키워내면서도 자신의 속에 담긴 응어리와 한을 글로 풀어내었던 한 인간의 삶의 흔적을 본다.
알 것 같다. 쉽지 않고 힘든 일이다. 그런 그의 아픔과 고통이 그가 쓴 시 <사마천>에 잘 드러나 있다. 먼저 떠난 남편에 대한 원망도, 불의의 사고로 죽은 아들에 대한 애달픔도 글을 쓰면서 위로받았을까. 모든 사람이 그럴 거다. 내가 하는 일이 언제부턴거 경제적 문제와 삶의 철학의 경계에 서는 일이다. 그저 밥벌이로 하는 일이었는데, 그 일이 어느날부터 내 인생에 대한 깊은 연민과 통찰을 주는가하면, 반대로 인생의 깊은 철학에서 시작되었던 작업이 어느새 밥벌이로 연결되어 나와 가족을 연명하게 하는 일도 있는 거다.
원주를 간다면 그 어느곳보다 이곳 박경리 문학공원에 들려보기를 추천한다.
용소막 성당 앞 계단 용소막 성당 출입구 앞.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들. 안에서는 예배가 행해지고 있다. 성당의 역사보다 더 오래된 느티나무 나무에 잎이 무성해진 여름이면 붉은 벽돌 성당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용소막 성당은 강원도에서 세 번째로 건립된 성당이다. 건물이 지어진 건 1915년. 약 100년이 넘는 세월을 이 자리에서 지역민들의 평안을 기도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성당도 성당이지만 성당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다섯 그루의 느티나무들이 영묘하다. 성당으로 모여들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모인 성당을 둘러싼 아름드리나무들. 성당보다 더 오랜 역사로 이 땅을 지키고 있는 나무들. 150번의 사계를 지나오고 처음 찾아왔던 사람의 자손과 그 자손의 자손이 찾아오는 것을 지켜보는 저 생명들은 이날 이곳을 찾은 우리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원주 여행의 마지막 경유지였던 용소막 성당을 한바퀴 돌면서 이번 여행의 이름을 생각해 본다. 그 겨울 원주, 우연 2022. 대학 선후배 동기 사이인 우리 넷은 실로 십여년의 세월을 건너 오랜만에 함께 긴 밤을 같이 보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도 풀어 보았지만, 편안하고 시답지 않게 오고간 농담들이 어쩌면 우리가 가지고 싶었던 시간이 아닐까. 경직된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푼 뜻하지 않은 여유. 이제 좀 마음의 짐들을 내려놓고 살면 좋겠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내 주위의 사슬들을 끊어내긴 어려울 거다. 하지만 이제 스스로의 마음을 드넓은 평야에 선 초인처럼 깊은 협곡을 바라보는 의인처럼 잠시만이라도 자신만의 세상을 다시 꿈꿀 수 있었던 시간이었길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