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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뜯어먹고 사는 거 아니다.”

어머니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다 큰 아들이 늦은 나이에도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아마도 턱없이 높은 외모에 대한 기준 때문이라고 보셨을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난 내 기준에서 매우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살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아름다움은 꼭 외모만을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하고 같이 살다 보면 자잘한 긴장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다. 남편이란 작자가 금요일 후배들과 새벽까지 술을 먹다가 들어와서는 토요일 온종일 뒹굴뒹굴하며 보내고 일요일마저 집에서 게임만 하고 있으니, 모처럼의 휴일이 맥없이 그냥 가는 게 못내 아쉬웠을까. 아내는 부산스럽게 외출 준비를 했다. 초췌한 내 몰골 때문인지 아니면 나에게 화가 났는지, 나에게 나가자는 말도 안 하고 민서를 데리고 개웅산에 다녀오겠다는 거다. 일단 아내 얼굴에서 노랑 신호등(주의)에 불이 들어왔다는 신호다.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그냥 내보내면 난 죽는다.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이틀 내내 비가 내린 터라 나는, "비 온 뒤라 개웅산 온통 진흙길일 거야. 잠깐만 기다려. 민서 자전거 끌고 안양천에 같이 나가자."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아내는 화가 나도, 잘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다가도 시간이 지나고 속으로 삭이면서 풀어낸다. 짜증 내며 징징거리는 민서와 컴퓨터 앞에만 앉아서 게임만 하는 나를 보면서 내심 많이 답답했나 보다. 안양천을 나와 가을의 둔치를 걸어 다니다가 고척교 아래 마련된 메밀밭에서 잠시 쉬는 그의 얼굴에 여유로운 웃음이 떴다. 다 풀어냈구나.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간은 관계를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외모를 보기 위해서는 거울만 있으면 되지만 자신의 마음을 보기 위해서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를 통해서 내 마음의 저 깊은 곳까지 볼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통과해야 할 첫 관문인 것이다.

하지만 타인과 맺는 관계를 자신의 문제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변질시키기도 한다. 이 사람한테는 이래도 되겠지, 이 사람은 이러는 나를 이해할 거야, 하는 마음은 자신의 문제를 상대방에게 떠넘기기 위한 기만이다. 이는 깊은 관계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오래된 인연이 이런 이유로 돌아선다.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제를 떠넘기는 게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똑바로 직시하는 객관적 자아를 형성하는 것에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믿는다. 때로는 끊어질 듯한 긴장감을 형성하는가 하면, 때로는 느슨한 무관심을 지속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끈의 길이는 약간 길었으면 좋겠다. 그 사이에서 바람이 무심히 지나가고 그 바람 사이로 서로의 체취를 맡으며 언제나 그리워할 수 있도록 말이다. 곁에 있어도 네가 보고 싶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런 그리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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