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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맞바람을 맞으면 힘들지."


어제 부두터미널에서 나에게 제주도 여행에 조언을 준 그 민박집 아저씨가 오늘 저녁에 만났을 때 한 말이다. 거리는 그다지 길어 보이지 않는데, 정말 제주의 바람은 다신 만나기 싫은 괴물이다.


오늘 아침은 서귀포 찜질방에서 시작했다. 밤새 코고는 아저씨 때문에 잠을 설쳤다. 이리저리 피해 다녀 보았지만, 수면실을 제외하고 찜질방이 춥다.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지만, 7시에 일어나 샤워만 간단히 하고 다시 페달을 밟았다. (제주 서귀포 찜질방은 7000원에 옷대여료 2000원을 추가로 받는다)


서귀포 월드컵경기장을 나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천지연 폭포. 그러나 입장료가 2천원에다가 찾아가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입구에서 돌아섰다. 다음 정방폭포를 찾아가 본다. 역시 입장료 2천원을 받지만 멀리서 훔쳐볼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그냥 그렇게 눈에만 살짝 담아보고 돌아섰다.


관광지에 온 것처럼 여유있게 다닐 수 없었다. 오늘 가야할 거리는 어제보다 길면 길었지 짧지 않다. 게다가 바람도 아마 여전할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출반전부터 점찍어 놓은 곳을 제외하고는 주마간산(走馬看山)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5시 전에 제주시의 민박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달려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주마간산이라지만, 제주는 눈에 담기에도 벅찰 만큼 아름답고 멋진 풍광들이 가득했다. 자전거를 멈추고 카메라에 담는 것은 그 수십 수백의 풍경 중의 몇 개에 불과하다. 내 기억의 동영상에 비하면 사진기에 실린 몇 장면은 몇천분의 1초에 불과한 장면일 것이다.


아침을 먹지 않고 나왔었다. 금방 식당이 나오겠지 싶었는데,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아 지나다가 서귀포시내를 벗어나자 식당이 안보인다. 간혹 나오는 식당에 들어가 아침식사가 되는지 물으니 아직 안된단다. 낭패다. 아무리 달려도 식당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어느 학교 앞 분식집에서야 아침식사(김밥과 라면)를 했으니 대략 10시를 훌쩍 넘어서다. 밥도 안먹고 2시간 반을 달렸다. 물론 중간에 비상식으로 가지고 있던 쵸코바 하나를 먹긴 했지만, 오늘 낌새가 상당히 안 좋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 예감은 이상하게도 들어맞아 오늘 그렇게 한끼 먹고 점심은 건너뛰고 민박집에 와서야 저녁을 먹었으니 달리는 동안 딱 한끼만 해결한 것이다.


그렇게 달렸지만 서귀포를 지나 서서히 북상하는 길이 시작되자 예상대로 맞바람을 상대해야 했다. 엄청난 맞바람은 어제와 똑같았다. 내리막길에서조차 최고속도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맞바람은 심하게 나를 괴롭혔다.


중간중간 쉬는 시점에서 지도를 확인하고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길을 찾아가보는데, 꼭 가기로 한 섭지코지와 성산일출봉을 가게 된다면 5시까지 제주에 들어가는 게 무척 어려워질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페달을 밟아보아도 내 체력으로 이 맞바람을 뚫고 가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기껏해야 평지에서 3단, 속도가 평상시 보다 절반 이상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12시가 좀 안되어 섭지코지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였다. 그 입구에서 1.5km를 더 들어가야 한단다. 어찌됐던 이곳이라도 가봐야 한다는 오기에 입구로 진입했다. 곧이어 내 뒤에서 관광버스 다섯 대가 추월해 간다. 섭지코지 주차장에서 보니 초등학생들이 섭지코지로 올라가고 있다. 섭지코지는 그 전에도 제주의 명소였지만, 드라마 '올인'의 촬영장소로 더 유명해졌다. 지금도 그 셋트장이 관광코스로 활용되고 있었다.


아이들만 아니었으면 무척이나 운치 있게 구경했을 것 같다. 한꺼번에 많은 아이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어수선을 피우니 좀 섭하다. 아이들이야 단체 관광을 온 마당에 여행의 멋과 흥미를 친구와 짓고 까부는데 쏟아 붓느라 정신없지만 다른 관광객들은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라 이해는 하지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러나 서운할 틈도 없다. 섭지코지를 돌아보고 다시 페달을 밟아 갔다. 절반 정도 시간이 지났는데, 간신히 절반을 온 것이다.


제주는 봄날씨다. 야생화들도 한참이었고, 심지어 유채꽃까지 피어있는 곳도 발견했다. 어느 곳인가에서 상큼한 감귤 냄새가 코끝을 자극해 왔다. 계속해서 맞바람을 보내 나를 괴롭히던 제주가 그 순간만큼은 색다른 즐거움에 빠져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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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일출봉의 입구에 도착한 시간은 1시 10분. 역시 많이 늦어졌다. 올라갔다 올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은 처음 출발할 때도 했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성산일출봉을 보고 못 오르니 안타깝기만 했다. 매표소 앞 편의점에서 멀리 일출봉을 보며 한껏 감상에 빠져 보았다. 오가는 신혼부부들이 부럽기만 하다.


성산일출봉까지 들렸다 나오느라 시간을 많이 썼다. 줄곧 제주시내까지 달려야 했다. 아, 그러나 저 제주의 바람은 앞으로 나가는 페달을 자주 멈추게 하고 말았다. 맞바람이 심할 때는 바람의 저항을 피하기 위해 손은 양쪽 손잡이가 아닌 중앙을 잡고 온몸을 핸들쪽으로 바짝 엎드려 최대한 저항을 피하는 자세로 페달을 밟았다. 자세는 약간 효과가 있었다. 간간히 보이는 제주의 밭과 돌담들은 그저 눈으로 보고 기억에 담을 뿐. 하지만 정말 걷고 싶은 돌담길을 만났다. 하지만 사진에 담는 것으로 하고 다시 바짝 엎드린채 페달을 밟는다.


한참을 그렇게 바람과 씨름하며 달리는데, 어느 동네어귀에서부터 개가 나를 뒤쫓기 시작했다. 내가 서면 이놈도 서서 나를 지켜보고, 내가 다시 달리면 또 따라온다. 좀 다가서려면 도망가고, 다시 자전거를 달려 도망가려면 악착같이 따라온다. 사실 도망가보려 했지만, 맞바람 때문에 속도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누구네 개인지 모르지만, 내가 참 한심한 속도로 달렸는지 지치는 기색없이 1km정도를 쫓아오는 것이 아닌가. 속으로 재밌다 싶으면서도 계속 쫓아온다면 필시 돌아갈 때 차도도 건너야 하고 여러 위험도 있을 수 있어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겁을 주고 돌멩이를 던져 녀석을 돌려보냈다. 잠깐의 만남이지만 참으로 기이하게 길동무를 경험한 것이다. 미국을 횡단한 홍은택 씨 역시 자전거 여행 중 수십마리의 개들이 자기를 쫓아왔다고 하는데, 나도 그런 경험을 하니 신기하기만 하다.


점심도 거르고 제주시내로 들어선 시간이 대략 5시. 여름이었으면 아직 한창 밝을 때겠지만, 11월의 제주에서 이 시간 해는 완연히 지고 있었다. 물어물어 민박집을 찾아가서 샤워와 빨래를 하고 오늘의 일과를 정리해 본다. 제주의 아름다운 모습들도 많이 봤지만, 징하디 징한 바람맛도 기억에 생생하다. 다리가 무척 피곤하다. 내일은 아침 일찍 한라산에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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