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이 시작됐다. 늘 그래왔듯이 월요일은 눈비만 없다면 따릉이를 타는 것이 좋다. 버스나 지하철이나 그 어느 요일보다 복잡하다. 짐짝처럼 실려가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나홀로 페달을 밟고 질주하는 게 좋다. 오늘도 그런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집앞 따릉이 주차대를 보니 대기 자전거 "0". 좀처럼 보기 어려운 숫자다. 월요일이니 그렇다. 보통 2~3대 정도는 남아 있더니 오늘은 씨가 말랐다. 좀 멀리 떨어진 전철역 앞 주차대에는 따릉이가 많이 남아 있다. 거기서 따릉이를 타고 갈까, 아니면 그냥 지하철을 타고 갈까? 전철역을 향해 가는 도중에도 수십번 생각이 왔다갔다 한다.
'그래도 지하철은 버스보다 나을 거야.' '아냐, 지하철이나 버스나 월요일의 저주는 피할 수 없어.' '그래도 시간이 이미 많이 지났어. 따릉이 타고 갔다가는 지각하겠어.' '가뜩이나 오늘부터 사원증 패스 사용한다는데 첫날부터 지각자로 찍히면 안되는 거야.'
전철역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 난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잰다. 뭐 하나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이 그대로 폭발한다. 아니 이런 사소한 일에도 왜 이렇게 생각이 복잡하고 심난한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다. 나이가 들면서 좀더 대범해지고, 자유로워져야 하는데, 별것도 아닌 일이 생각이 좁고 편협해지고 쪼그라든다.
따릉이를 탈 거냐 안 탈 거냐라는 생각은 저 멀리 달아나고 나는 왜 이런 생각에 빠져 출근하고 있나라는 자괴감 비슷한 감정이 솟구쳐 오른다. 이쯤되니 내 자신이 한심하고 초라하다. '까짓거 지각 좀 하라지, 난 짐짝이 되기 보다 자유로운 영혼이 되겠어.' 라는 생각으로 따릉이를 선택했다. 결과에 책임지면 되는 것이며, 최선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되는 거다. 안전한 선에서 최대한 빨리 페달을 밟는다면 지각하지 않을 것이다. 설령 지각을 좀 하더라도 그에 대한 책임은 크지 않다. 언제나 선택이 나를 만드는 거다. 작은 선택이 큰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결국 책임은 스스로 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임을 안다면 어떤 선택이든 나쁘지 않다.
결국 난 따릉이를 타고 출근했고, 보통 때보타 20여분 정도 늦게 출근했지만 지각은 하지 않았다.
모름지기 피규어라는 것은 자신의 감동을 기록한 영예로운 수집품 중의 하나일 것이다. 책상 위 또는 책장에 늠름하게 전시되어 있는 피규어는 과거 기억에 다시 몰입할 수 있는 상징물이며, 잊고 있었던 꿈의 한 조각을 다시 불타오르게 할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가 좋아하던 애니메이션의 작은 피규어들을 모아왔었다. 뽀로로로 시작해서 로보카 폴리, 꼬마버스 타요, 신비아파트의 신비를 비롯한 여러 귀신들과 숲속 요정 페어리루, 아이엠스타와 프리파라의 아이돌까지 일본 애니메이션 피규어까지····
어릴 적에 모은 작은 장난감들이야 아직 아기때인만큼 큰 부담없이 사줄 수 있었다. 아이는 혼자 있는 시간에 그 장난감들로 역할극 놀이에 곧잘 빠져들면서 즐거워했다. 뽀로로와 크롱으로 장난을 치는 모습을 표현하고, 타요와 폴리를 이용해 위기에 빠진 친구를 구하고, 페어리루를 통해 꿈을 키워갔으며, 아이돌 인형은 딸의 사회적 관계를 보여 주곤 했다.
요새는 좀 크면서 유튜브에 더 정신이 팔리고 있고, 또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보다 캐릭터 그리기에 빠져 있어 장난감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다. 그러다가 빠져든 게 일본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이다. 15세 등급이지만 내가 보여주기 전부터 유튜브를 통해 내용을 훤하게 꿰고 있었다. 결국 넷플릭스에 올라온 초반 작품들을 모두 섭력하고 나서는 영화판으로 나온 무한열차편을 간절히 보고 싶어 했다.
아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부분은 액션의 표현과 캐릭터들의 역동적인 모습, 즉 귀엽기도 하고 멋지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표현들이 재미있었었나 보다. 캐릭터의 색감이나 표현도 무척이나 눈여겨 보는 듯하다.
올해 5월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 편>이 영화관에서 본 후 아이는 한층 들떠 있었다. 함께 영화를 관람했고, 영화 속 캐릭터에 쏙 빠지면서 피규어를 갖고 싶어 했다. 그래서 5월에 해외 직구 방식으로 귀멸의 칼날 캐릭터 '젠니츠'를 구매했다. 해외 직구 방식이라서 그런건지 당시에 구매한 피규어가 6개월이 지난 어제서야 도착했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갑작스럽게 도착한 택배 상자 안의 젠니츠 피규어는 낯설게만 느껴졌다. 생각보다 덩치가 크고 디테일은 좀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이전 피규어들이 손바닥보다 작았는데, 젠니츠 피규어는 아이의 팔뚝만큼 키가 커서 어색하다. 대부분의 아이 피규어들이 머리라도 움직일 수 있는 것에 비해 젠니츠 피규어는 그냥 전시용이다.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다. 그래도 아이의 피규어 역사에 또 하나의 상징물이 들어섰다. 책장 한편에서 다른 피규어들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자리를 차지할 듯하다.
월요일 아침. 항상 같은 시간에 출근을 하지만 왜 월요일만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 오늘은 학생들도 별로 보이지 않았는데도 버스는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뒷문으로 탑승해서 간신히 문을 닫았고, 조금씩 주춤거리며 몇센티미터씩 들어가는데, 발이 무언가에 걸린다. 곧이어 어떤 사람이 외친다. "여기 휠체어 있어요. 죄송합니다. 발 조심해 주세요." 버스 뒷문 안쪽 공간은 휠체어 공간이다. 내가 탄 버스는 저상버스였고, 마침 휠체어를 탄 장애인 한 분이 탑승한 상태였다. 그런데 사람들의 발에 장애인의 발이 걸린다. 만원 버스에서 저마다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런 사정에도 자신의 출근길 전쟁을 치르는 북새통은 어쩔 수 없다. 거기에 낀 장애인의 고통은 더하면 더했지 편할리가 없다. 평상시 개봉동을 출발한 버스는 보통 신도림에서 많은 사람을 내리고 좀 한산해지다가 여의도에서 더 많이 내려 그나마 숨통이 트이고는 했다. 그런데 이날은 어찌된 일인지 신도림에서 더 많이, 영등포와 여의도에서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장애인의 발은 점점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게 되고, 뒷문의 출입구 앞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무간지옥이 펼쳐졌다.
출처: 투데이신문
서울 서남부 지역에서 서울 북동부까지 서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이 버스의 탑승객들은 여의도와 마포 일대에서는 주로 젊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구로와 강북, 노원에서는 나이든 분들이 많이 이용한다. 그만큼 다양한 이용객들이 이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출퇴근 시간의 배차 간격은 들쑥날쑥... 시종점에서 일정한 시간에 출발한다 해도 워낙에 긴 구간을 운행하다 보니 중간에 버스와 버스 사이의 간격이 너무 좁아지거나 벌어지는 불규칙해지면서 간혹 특정버스에서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의 그림이 펼쳐지게 된다.
"아휴 죽겠네. 저 쇼크 오면 버스 멈춰요. 그럼 여러분도 출근 더 늦어져요." 그의 외침은 공허하다. 막 버스로 탑승하는 승객들이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뒷문으로 승차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심지어 버스 기사마저도 앞문에서 타려는 승객들에게 다음 버스를 탈 것을 설득하거나 억지로 타려는 승객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판에 뒷문 승객들을 살펴볼 여력은 없다. 그렇게 되니 뒷문 출입구쪽은 아수라장이다. 장애인의 그만 타 달라는 외침도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버스를 타고서야 장애인의 존재를 인지할 뿐, 아무도 그에게 신경 쓰지도 신경 쓸 수도 없는 지경이다.
"지금 어디죠? 저 여의도역 가려고 하는데, 어디서 내리는 게 가까운가요? 여의도 환승센터라고요? 감사합니다. 어떻게 내리냐고요? 노래를 해야죠. 안 그러면 못내려요."
나도 밀리다 밀려서 그의 옆자리에 서게 되었고 목적지가 가까워진 그와 짧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드디어 여의도 환승센터에 버스가 도착했다. . 그 분이 외치기 시작한다.
"잠시 내렸다가 타 주세요. 저 내릴게요. (버스 기사에게) 기사님, 저 내릴게요." 뒷문에 서 있던 사람들이 길을 열어 주었다. 잠시 기다려 보지만 버스 휠체어 승하차용 발판이 내려오지 않자, 다시 그 분은 다시 바깥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저기 선생님, 힘좀 쓰실 수 있으면 제 휠체어 좀 잡아 주시겠어요? 아니 그렇게 잡으시면 허리 나가요. 여기 잡아 주세요." 이때, 승하차용 발판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는 무사히 하차할 수 있었다. 그는 9호선을 타는게 목적이었던거 같은데, 9호선 전철은 무사히 탔을까? 9호선도 출퇴근 시간에 지옥도가 펼쳐진다는데...
그의 말대로 그는 새벽부터 나섰어야 했을까? 모르겠다. 비교적 시간을 칼 같이 사용하는 현대인의 삶에서 굳이 장애인에게만 추가적인 시간을 요구하는 건 옳지 않다. 물론 휠체어로 이동하는 일이 다른 이동에 비해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혼잡한 버스에서 그가 겪어야 할 그 고통은 여러가지 생각해 볼 거리를 던져준다.
왜 이 버스는 이 시간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까? 혼잡한 버스에서 장애인을 위한 배려는 어떻게 가능할까? 휠체어 장애인을 위한 이동 수단으로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휠체어 장애인도 같은 인간이라는 점에서 더 편해져야 할 이유도 없고 더 고통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다만 그의 고통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 어쩌면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다. 그도 힘들겠지만 출퇴근 시간 대라 할지라도 필요하면 기꺼이 버스에 탑승하는 일을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도 그도 더 나은 방법이 나오기 전까지는 서로 같이 익숙해져야 할테니 말이다.
친구들과의 두 번째 둘레길 여행이다. 10월 16일 토요일 출발하면서 이번에는 현지에서 하룻밤 묵고 올라오기로 했다. 친구들과의 외박 여행은 그야말로 오랜만이다. 셋 중 둘은 코로나 백신 2차 접종까지 마친 상태이고, 나는 다음주 2차 접종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를 머뭇거리게 하는 건 코로나가 아니었다. 일주일전부터 예보되어 있던 가을비. 비가 얼마나 올까 노심초사하면서 기다리는데, 현지 예보에 따르면 약한 비가 오전 중에 그칠 거라는 것. 한 달 전부터 잡았던 일정을 강행키로 하고 다시 새벽길을 나섰다.
운리마을에 있는 지리산둘레길 8-9구간 시종점 표지판출발할 때 비가 왔다. 비를 맞으며 둘레길을 시작해야 했다.밤새 내린 비와 바람으로 낙엽들이 길에 가득했다.지리산의 마을마다 쉼터 같은 나무들이 있다. 때로 그 나무 아래에서 다리쉼을 하고 가도 좋다.포장도로는 끊기고 자연 흙길이 시작됐다. 멀리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보인다.&nbsp;비는 오락가락, 바삐 걷는 친구들, 무엇이 그리 바쁜가. 천천히 가세.겨울이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길가에 핀 꽃들에게도 눈을 돌려 보자고. 우리에게 인사하고 있지 않은가.운리마을을 벗어나 완만한 오르막길 임도가 나왔고, 그 정상에 작은 정자와 함께 지리산둘레길 안내판이 있다.&nbsp;7구간 웅석봉에 대한 트라우마일까? 급한 오르막길을 앞두고 긴장감이 돌아 사진 한방 찍는다.&nbsp;
비를 맞으며 걷는 일이 어려울까? 한여름 소나기라면 여행자에게 땀을 식혀 주는 바람보다 때로는 더 반갑다. 가을비는 어떨까? 숲속에서 만나는 가을비는 낙엽과 함께 떨어지면서 보다 우울한 정취를 깊게 해 준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만 울리는 숲 한가운데서 우리는 떨어지는 빗방울과 낙엽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슬픈 광경을 목도한다. 때로 우리 인생은 불운이 겹겹이 들이닥쳐 청구서처럼 펄럭일 때도 있겠지. 살다보니 정말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껴진 그 순간,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견뎌지더라. 그 인연을 위해 우리는 삶을 살아가고 견뎌내고 나아가는 것 아닐까.
비는 서서히 그쳐갔다. 지리산 둘레길의 정자가 있는 곳에 이 길의 유례가 실린 표지판이 있다.
솔숲과 참나무 숲이 우거져 있으며 숲길과 게곡길, 임도를 번갈아 가며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고령토를 운반하던 운재로가 남아 있으며 남명 조식 선생의 무덤에 이르는 길도 만난다. 마근담 계곡 따라 덕산 초입이 옛날 장터였다.
길을 가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참나무 군락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다행히 8구간에서 급한 오르막길은 없었다. 반대로 가장 멋진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nbsp;보드라운 흙길이 내내 이어진다. 아침 산길을 걷는 기분이 좋다.&nbsp;이런 곳에 모셔진 무덤의 주인은 심심하지는 않겠다. 둘레길 여행객들의 심심치 않을 방문을 받을테니.빽빽이 둘러싼 참나무 사이를 걸었다. 지리산둘레길의 참다운 아름다움을 여기 참나무숲에서 만난다.&nbsp;참나무숲 군락지를 걷는 일은 더없이 즐거운 일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햇볕이 내리 쬐나, 바람이 부나...
이곳은 지리산둘레길 중에서 참나무가 가장 많은 곳이라고 한다. 참나무에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좋은' , '진실'의 의미를 지닌 접두어 '참~'이 붙었는데, 그만큼 우리 조상들에게 여러 가지로 의미있게 쓰인 나무였다. 집을 짓는 목재로서뿐만 아니라 다 타고 남은 숯도 참나무 숲을 '참숯'이라고 부르면서 높게 쳐 준 것이다. 반대 의미의 접두어인 '개~'를 생각해 보면 더 쉽게 다가올 것이다.
그런 참나무들이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는 장관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밤새 내린 비 때문에 땅에서 올라온 황토흙 내음, 떨어지는 빗방울이 낙엽에 닿는 소리, 비에 젖은 숲의 나무와 땅이 주는 오묘한 빛이 함께 어우러져 자연의 오감을 한껏 느끼게 해 주었다. 지난달까지 울어 제끼던 매미 소리도 사라지고 새 소리마저 드물었던 이날의 숲은 인상적으로 내 기억에 남았다. 도시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쌓여 왔던 답답함과 긴장감이 이곳 참나무 숲에서 순식간에 씻겼다.
참나무숲 군락지는 걷기 좋게 잘 다듬어져 있다.&nbsp;참나무 군락지를 안내하는 안내판
비도 많이 그치고 나뭇잎에 매달린 빗방울들만 간간히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nbsp;10월 중순. 가을이 여기 지리산까지 내려오고 있었다.&nbsp;
참나무 군락지를 지나면 백운 계곡이 나온다. 남명 조식 선생이 이곳을 매우 아겼으며 자주 찾았던 곳이다. 그와 관련된 일화들이 표지판에도 나와 있다.
조식 선생에 대해 아는 바는 없었다. 다만, 그가 평소에 "지식을 알면 행해야 한다"는 것(실천궁행實踐躬行)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알면서도 행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다. 부조리와 비합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인정하거나 체념하는 일이 많아진다. 수없이 조정으로 천거되고 높은 벼슬을 추천받았으면서도 결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이곳 산청에서 후학 양성을 위해 평생을 살았던 이 분의 모습이 어쩌면 고고한 학자로서의 표상일 수는 있겠다.
게다가 조식 선생이 이러한 생각(실천궁행) 때문에 퇴계 이황과도 크게 다투었다고 하니 그가 큰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생각해 보면 이황이나 이이의 유학이 세상의 일이나 인민의 안락과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조식 선생의 학문이 훗날 북학파, 실학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하니 누가 더 세상 사람에게 이로웠는가는 물을 필요가 없겠다.
백운계곡의 모습백운동 계곡둘레길 안내 이정표와 돌무덤.&nbsp;쓰러진 나무가 위태롭게 보인다.&nbsp;작은 대나무들이 길 옆에서 여행객들의 손을 잡아준다. 떨어진 댓잎들이 바스락거리며 밟힌다.울창한 숲이 산을 이룬다. 산이 숲을 가꾼다. 사람은 그저 머물다 갈 뿐이다.
백운계곡을 지나 다시 산길을 걷다보면 마근담을 만난다. 마근담의 어원은 '막은담'에서 왔다고 한다. 온 사방이 산으로 담을 쌓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유래했다. 공기가 맑고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는 곳이다.
마근담에서부터는 흙길이 아닌 시멘트-콘크리트 길이다. 여전히 주위는 높은 산으로 에워싸여 있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게다가 이날 따라 바람마저 거세어 온 산의 나무들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약한 잎들이 바람에 떨어져서 하늘 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보니 가을이 실감난다.
내려가는 길에는 감농장이 지천이다. 산청은 감이 유명하고 이곳에서 생산된 감을 이용해 곶감을 만들어 도시로 내보내는 모양이다. 감나무에서는 감들이 한창 익어갔고, 감 농장의 한켠에서는 곶감을 만들기 위해 감을 매달아 말리기 위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1월에는 산청 곶감 축제가 열릴 만큼 이곳 산청에서 곶감은 무척이나 중요한 생산물이다.
사실 곶감은 해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건조 과일은 다양한 형태로 만날 수 있긴 하지만 곶감이 주는 매력은 여타 마른 과일들에 비교하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 이곳 산청 곶감은 지리산의 깊은 산속에서 겨울을 난다. 이 곶감을 먹는다면 지리산의 맑은 공기를 함께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마근담으로 내려 서는 길.&nbsp;마근담길은 대부분 포장도로로 덕산까지 이어진다.산청은 곶감으로 유명하다. 매년 1월 산청곶감축제가 열린다. 감나무에는 곶감이 한창 익어가고 있었다. 주민들은 곶감에서 빨리 거둔 감들로 곶감을 말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을 주민들이 모여 함께 빨래를 하던 공동 빨래터. 이제는 보기 드문 모습이다. 남명 조식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조가 내린 비지리산둘레길 9-10구간 시종점 표지판.
이날 9시에 운리마을에서 시작해 1시에 덕산(시천면 산천재)의 시종점에 도착하는 걸로 마무리했다. 우리는 조미원이라는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다음날 서울로 상경했다.
10월 한 달 간 주 4일 근무를 할 수 있었다. 첫 주 10월 4일과 둘째 주 10월 11일은 대부분의 직장인들(5인 미만 사업장 제외)이 쉴 수 있었던 대체 공휴일이다. 셋째 주에는 목요일 백신접종을 예약하고 금요일 하루를 백신 휴가로 쉬었다. 물론 백신 후유증으로 내내 고생했지만, 아무튼 근무를 하지 않은 날이다. 마지막 주에는 사실 연차를 썼다. 불가피한 연차였다. 연차 사용을 주 4일 근무에 포함시키는 건 좀 억지겠지만 어찌됐든 내 생활 패턴이 10월 한 달 동안 주 4일 근무의 실험을 진행한 셈이다.
꽤 편안했다. 이전부터 있었던 토-일 주말 외에 하루가 더 있으니 마음이 정말 편안했다. 평상시 내 주말은 가족이 있고, 부모님과 가까이 살다 보니 온전히 내 시간으로 쓰는 건 거의 상상하기 어렵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다양한 문화 생활을 누릴 수 있는 형편도 아니다 보니 그저 집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부모님 집에 방문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주말 일상의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하루라는 시간이 더 생기니 마음이 더 편하고 무언가 더 해 볼 수 있겠다는 의지도 생긴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는 잘 모르겠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간다. 그냥 소파에서 넷플릭스나 보거나 밀린 책을 읽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좀더 이런 시간이 오래 주어진다면 보다 더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일들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다. 내가 일하는 동안 주 4일 근무제가 실시될까 싶지만,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일 거다.
뭐 사실 주 4일 근무에 매달리기 보다는 자유로운 근무와 휴식이 더 좋을텐데 그건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여하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주 4일근무를 경험하고 나니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풍부해지고 시원해지고 있다.
무선 키보드를 마침내 장만했다. 옛 타자기 느낌의 디자인으로 키감도 확실하고 소음이 매우 적다. 무선 키보드를 살 때 두 가지 우려했던 것이 있다. 하나는 키감이다. 노트북의 키감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일반 PC 키보드의 확실한 키감을 넘어 집에서는 기계식 키보드를 사용하다 보니 노트북처럼 누른건지 안누른 건지 알 수 없는 느낌의 키감을 꺼려한다. 우선 이번 키보드는 키감에서는 확실히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다만 사람에 따라서는 좀 뻑뻑한 느낌이 들 수는 있겠다. 다음은 PC와 태블릿을 오가며 사용할 수 있는 편이성이 잘 구현되느냐이다. 별다른 조작없이 Function 키로 쉽게 전환이 가능하다. 태블릿과 PC를 오가며 사용하기에 아주 좋다. 지금 작성하고 있는 이 후기 역시 무선 키보드를 활용해 태블릿에 작성하고 있다.
일단 두 가지에서 만족스럽다. 여기다 더해 구식 타자기 느낌으로 레트로 감성을 한껏 느낄 수 있어 좋다. 따라서 편의성, 디자인, 효용성 모두에서 만족스러운 물건이다. 오랫동안 나와 함께 다음 교육과정과 교과서 업무를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지리산둘레길 1~6구간, 주천에서 성심원까지는 아내와 딸이 함께 걸었다. 그러나 아내의 건강 문제로 오래 걷는 게 힘들어졌다. 아내가 빠지니 아이도 안 걷겠다고 버틴다. 걷기, 오르기, 그리고 견디기... 아이에게는 좀 지루하고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아빠와 딸의 여행은... 앞으로 10년 뒤에나 가능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서운하지만 다가올 미래를 위해 아이의 성장을 기다리고 내 건강을 살필 시간이다. 가족과 함께 서울둘레길을 완주했을 때의 그 기쁨과 희열을 잊을 수 없다. 항상 엄마가 앞에 서고, 어린 딸이 중간에, 내가 맨 뒤에서 걸었다. 어린 딸이 10여km를 아무 투정없이 걸었을까. 한번은 내가 아이를 업고 걸었던 일도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길을 아이는 잘 걸었다. 힘겨웠던 시간은 지나면 영광의 기억으로 남는다. 그렇게 지리산둘레길은 자연스럽게 세워진 목표였다. 서울둘레길에 비해 멀리 있다는 점이 걸림돌이지만 이는 내가 좀더 부지런히 움직이면 극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가족과 이루려 했던 지리산둘레길 완주의 마음은 결국 그렇게 접었다. 하지만 그렇게 접을 수는 없어서 친구들에게 제안해 보았다. 그렇게 세 친구들이 모여 지리산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7구간부터 걷는 것에 대해 아무 불만이 없었다. 그동안 내가 아내와 함께 지리산둘레길을 걸어 왔던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가족끼리 가지 못한 사연도 이해해 주었다. 못다한 완주의 꿈을 다시 시작했다.
성심원 나루터의 흔적성심원 길. 경호강을 끼고 걷는다.
9월 4일. 여느 때처럼 새벽에 나섰다. 친구들도 약속된 시간에 늦지 않게 모였다. L은 전날 늦게까지 영업한다고 술을 엄청 마셨단다. 운전하는 내내 옆자리에서 수다를 떠드니, 차 안이 술냄새로 가득해진다. 어차피 초반 운전은 내가 해기로 했고, C가 내 뒤를 이어 운전했다. 새벽 4시에 나섰지만, 도로는 분주했다. 사람들의 토요일 새벽길도 바쁘게 돌아갔다. 함양 휴게소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성심원 앞에 차를 주차했다. 친구들이 급하게 서둘렀다. 기념 사진도 찍자마자 저만치 가버린다. 황급히 쫓아가면서도 발걸음은 가볍다. 세 친구의 둘레길 여행은 이렇게 첫발을 내디뎠다. 성심원 앞에는 경호강을 건널 수 있는 나루터의 흔적이 남아있다. 1988년 제대로 된 다리가 세워지기 전까지 이 나루터를 통해 사람들은 성심원을 오갔다고 한다. 이제는 흔적만 남아 있는 나루터에는 이날 텐트가 쳐져 있었다. 누군가 거기서 하루를 묵었나 보다. 둘레길 여행객일까, 낚시꾼일까? 경호강은 은어 낚시로 유명하다. 우리가 찾아간 9월은 은어철이 아니지만, 강을 따라 가는 길에 낚시꾼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경호강을 따라 걷다 보면 다시 산으로 향한 길이 나기 시작한다. 아침재를 향해 오르는 길이다. 비교적 완만한 오르막길로 이어지고, 차량 통행이 가능한 포장도로 길이 한참 이어진다. 그러다가 만나는 첫번째 고갯길이 아침재다.
경호강을 벗어나 걷는다.아침재. 여기서 어천마을로 가는길과 웅석봉 가는 길로 나뉜다. 119농원 앞. 119 대원으로 일하시던 분이 만든 농원일까? 이름이 신기하다.
아침재는 어천마을과 성심원 사이의 고갯길이다. 여기서 오른쪽길이 웅석봉으로 가는 길이다. 계곡을 만나기 전까지 편안한 산길은 계속 이어진다. 점점 더 숲으로 들어가면서 길은 좁아지고 길을 덮는 풀들도 키가 높다. 이런 산속으로 수천년 동안 사람이 마을과 마을을 잇기 위해 등짐을 지고 날랐을 것이고, 배고픈 산짐승들이 먹이를 찾아 헤매였을 거다.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변하니 사람들은 유람을 위해 산속을 거닌다. 걸으며 듣고 보고 느끼는 것들은 도시 생활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옛추억들을 되살린다. 단지 옛 생각에 젖어들기만 해서 이 산길을 찾는 걸까? 복잡한 일상과 피곤한 인간 관계를 떠나 한나절 아무 생각 없이 오감만을 되살리며 걷는 일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다.
119농원을 지나서 조금만 걸어가면 작은 계곡을 하나 건넌다. 다리가 따로 없다. 물이 적을 때는 그냥 건널 수 있겠는데, 전날 비가 와서 그런지 훌쩍 뛰어 건너기는 약간 불안했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발을 물에 담그며 건넜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숲속이었지만 깊은 산에서 내려온 물은 얼음장처럼 차갑다. 이 물은 웅석 계곡을 지나 어천 마을 앞을 흐르다가 경호강에 다다른다. 여기까지는 여느 지리산 둘레길과 다르지 않았다. 7코스 중의 가장 큰 난코스는 이 계곡을 넘어 시작된다.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되기 전의 계곡물이 상상 이상으로 차가웠다.계곡을 건너자마자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좁고 가파른 길이다.크게 자란 버섯들을 많이 보았다. 당연히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다. 그래도 자태는 아름답다.
계곡을 건넌 후부터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진다. 지그재그 오르막길이 웅석봉하부헬기장(지금은 정자가 지어져 있다)까지 내내 계속된다. 둘레길이 처음인 두 친구는 이런 길이 어떻게 지리산 둘레길이냐며 혀를 내둘렀다. L은 전날 과음한 탓에 더 힘들어 했다. 땀을 비오듯 흐르는 그를 받쳐주면서 걷는 데 땀에서 술냄새가 났다. 작작 쳐먹지... 게다가 물을 그렇게 마시니 저러다 탈수증이 걸리지 않나 걱정될 정도였다. 여러 여행 후기에서도 7코스에 대해서 힘들다는 평이 많다. 지리산둘레길 5코스 중에 있던 산불감시초소도 꽤나 힘든 오르막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여기 웅석봉 오르막길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좁은 산비탈길을 그야말로 한뼘씩 타고 오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지루하고 힘들다. 해발 고도로 보아도 산불감시초소는 약 600m지만 웅석봉 헬기장은 800m에 약간 못미친다. 예전에는 지리산 종주를 거의 매년 했었지만 이제 산에 올라간다면 덜컥 겁부터 먹는 나이가 됐다. 온전한 산행을 안 한지 꽤 오래됐다. 가족과 함께 둘레길 여행을 시작하면서 더 안가게 된 것이다. 그래도 마음 한켠에는 젊은 시절의 그 낭만과 열정을 마음에 품고 산에 오르고 싶다. 몸이 따라주지 않겠지만 세월의 노련함와 여유로 산을 오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이번 웅석봉 오르막길도 그런 마음이었다. 좀더 크게 심호흡하면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신중하게, 힘들다고 땅만 보고 걷지 않고 잠시 허리 펴고 나무와 하늘도 쳐다 보고, 그렇다고 발 아래에 핀 버섯과 야생화와 풀들에도 눈길 주는 것도 잊지 않기. 2~30대의 나 역시 그랬을 테지만, 4~50대의 나도 그렇게 산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며 걷는다. 웅석봉 하부헬기장의 정자에서 중년 부부를 만났다. 50대로 보이던 두 부부가 함께 산행을 나왔다. 웅석봉 꼭대기로 올라간다면서 지리산둘레길은 다 돌아봤는데, 정말 좋았다고 이야기해 준다. 숨을 헐떡거리며 올라온 우리 일행을 위해 지리산둘레길의 아름다움을 줄줄이 이야기해 주니 친구들이 좋은 기운을 받았다. 힘들게 올라온만큼 여기서 준비해 간 맥주와 약간의 간식거리로 배를 채웠다. 그렇게 한참을 쉬고나니 기운이 돌아왔다. 다시 나머지 길도 내쳐 나아가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다행히 여기서부터는 임도를 따라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말한마디 나누기 어려웠던 오르막길과 달리 내려가는 도중에는 셋이 나란히 뭉쳐서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도 나눌 수 있었다.
웅석봉 하부 헬기장부터는 평탄한 내리막길이다.달뜨기 능선으로 불리는 곳이다. 산 중턱에 도로가 보인다. 큰달맞이꽃. 달뜨기 능선이 보이는 언덕에 홀로 피어 있었다. 운리 마을 초입. 어느 가정집의 담은 작은 대숲이 펼쳐져 있다. 단속사지 석탑. 절은 사라졌지만 석탑은 남아 있다. 다시 지어진 거겠지만...
2시 즈음 운리마을에 도착했다. L이 준비한 간편 식량은 물만 있으면 저절로 열을 내어 음식을 데울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L은 물을 준비하지 못했고, 우리가 준비한 물도 그가 웅석봉 오르는 길에 거진 다 마셨다. 물 부족을 겪으며 내려온 찰나에 밥을 먹으려니 물이 없네. 결국 L이 운리마을 경로당을 찾아가 물을 얻어 와 간편식으로 늦은 점심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9시 즈음 출발해 2시 즈음 마쳤으니 그리 오래걸린 여정은 아니다. 다만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어야 했고, 지리산둘레길 중 손꼽을만한 힘든 길을 거쳤으니 이후 둘레길은 여유롭지 않을까 기대한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직장 동료들이 가끔씩 던지는 말이 있다. 젊었을 때는 절대 하지 않았던 말인데, 나이가 드니 저절로 입밖으로 터진다. 변하지 않는 구조와 회사의 인식에 대한 자괴감을 담아서 이렇게...
"어차피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넷플릭스 드라마에서 20대의 젊은 청년 조일병이 내뱉던 그 말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절망의 끝에서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무시무시한 폭력 앞에 내던져졌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누구도 손내밀지 않았으며 모두가 방관했다. 그 절망 앞에서 그는 마지막을 향해 폭주했다. 누가 착하고 순했던 조일병을 그렇게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은 의미없다. 답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누구나 떠들 수 있다. 하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군 시절(1993~1995) 중대 행정반 게시판에는 군부대 사건사고들이 매주 업데이트 되었다. 나름 경각심을 주기 위해 사례들을 제시함으로써 불미스러운 사고(?)를 막겠다는 취지였지만, 사고의 디테일한 내용이 다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저 누가 어떤 일로 어느 정도의 부상(또는 사망)을 당했으며 어떻게 처리되었다는 정도만 나올 뿐이다. 제시된 내용으로 보면, 대부분의 사고들은 부주의가 원인이거나 병사간 사적 충돌이었고, 일부 상급자의 가혹행위로 인한 단순 사고였다.
군에 있을 때 옆 대대의 병사가 목욕탕에서 상급자의 폭력에 의해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부대 전체가 발칵 뒤집히고 소원수리함이 다시 설치되고 모든 병사들이 장교들에게 불려가 일대일 면담을 진행했다. 이런 사고를 원천적으로 막겠다는 것 보다는 병사들의 군기를 다시 잡겠다는 의지로 보였고, 그 기간 중 내무반은 거짓된 엄숙함과 적막함으로 채워졌다. 그 결과는? 군대 내 대부분의 일들이 그러하듯이 크게 변하는 건 없었다. "어차피 변하지 않는다."와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말로 한 시기가 지나가길 기다릴 뿐이다.
드라마 <D.P.> 속 주 공간은 군 병영과 내무반이며 이곳은 짐승들의 공간이다. 내가 다닌 1990년대의 군대와 똑같았다. 내무반의 침상과 관물대, 모포 각잡기, 붉은 취침등 밑에서 주전자로 물을 뿌리고 신라면 뽀글이를 먹는 모습까지 판박이다. 심지어 은밀한 폭력의 공간인 건물 뒷편, 비품 창고, 초소도 아픈 옛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폭력과 부조리, 비합리가 계급과 상명하복이라는 명분으로 공공연하게 벌어졌던 공간들이다.
드라마 속 시간(2014년)은 나와는 한참 멀다. 그런데 폭력의 정도는 극악할 정도다. 물론 영화 속 폭력이 모든 군부대에 똑같이 적용되긴 어려울 것이다. 1990년대 군 복무를 했던 나와 2010년대 군 복무를 했던 사람들은 20년의 시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변한게 없다.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국방부 시계는 멈추어 있거나 아주 느리게 갔던 것은 아닐까?
변화와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는 젊은 20대 청년들을, 계급으로 나누고 복종을 강요하고 다름을 용납하지 않도록 훈련했던 군대의 본질적인 내용이 변화했을까? 난 여전히 답을 모르겠고, 질문도 할 수 없으며, 관심을 가지기가 두렵다. 군 제대 이후 한참동안 군에 재입대하는 꿈을 꾸었다. 언제가부터 이제 그런 꿈을 꾸지 않았는데, 이 드라마 <D.P.>를 보면서 그 꿈이 다시 나타날까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