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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컴퓨터는 인터넷과 문서작성 등 아주 간단한 프로그램만 돌리고 있는데, 요 며칠 한글이 맛이 갔다. 궁여지책이라고 그동안 MS워드라도 써 봤지만, 워낙 손에 익은 프로그램이 아니다 보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며칠 전 친구로부터 한글 프로그램을 받았는데 그 친구 말로는 회사에서도 잘 깔아서 쓰고 있는 것이라면서, 아마도 아무 문제없이 잘 될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더라.

문제는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았던 프로그램 까는게 이렇게 새벽까지 이어질 줄이야. 잘 깔리던 프로그램이 막판에 오류메시지가 뜨면서 모두 취소해 버리고 끝나버린다. CD를 빌려준 친구에게 물어봐도 알 수 없단다. 그저 “그거 우리집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깔렸어.”라는 대답만 들었다. 이놈의 컴퓨터가 문제다. 도대체 이 알 수 없는 현상 앞에 보잘것없는 나의 컴퓨터 지식은 석기시대로 후퇴하고 만다. 인터넷을 뒤져서 그 답을 찾아보려 하는데도 이거는 바위벽에 대고 열려라 들깨, 깻잎, 고추장, 된장 외치는 격이니, 딱히 '참깨'라고 하는 답은 도통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좌절 모드로 번번이 재부팅 되는 내 머릿속을 포맷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래도 이거 없으면 굶어 죽는다는 각오로 여기저기 모두 찔러 본다. 인터넷의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심정이야 오죽했겠나.

"한글이 안 깔려요."
"한글이 깔리지 않아요."
"한글 프로그램 깔리지 않는 경우"
"한글 깔리지 않"

이런 저런 문구들을 포탈의 검색창에 껴 넣어보아도 덥석덥석 잘 잡아먹기만 하지, 뱉어 놓는 것들은 영 시원치 않다. 좀더 상큼한 검색어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나 생각대로 하고 싶어도 생각대로 떠오르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

혹시나 해서 재부팅을 하고 다시 한글을 깔아 보아도 아까와 마찬가지다. 그러다가 문득 마지막 메시지에서 힌트를 얻었다.

“키를 열 수 없습니다”

벼라별 검색들이 다 나온다. 자기네 집 문이 이상하다는 얘기부터 중학생들의 자기 키가 크지 않아 고민이라는 얘기까지... 스크롤바를 쭉 내려 보니 간간히 프로그램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몇 개 열어보니... 그럼 그렇지, 역시 레지스트리 문제다. 개념도 이론도 전혀 알지 못하는 레지스트리...

시작->redgedit 입력-> 오류가 뜬 장소 찾아감

오류가 뜬 장소란, 그 오류창에 예를들어 HKEY_LOCAL_MACHINE\SOFTWARE\

하면서 쭉 뜨는데요, 하위 폴더까지 찾아가실 필요 없이 HKEY_LOCAL만 보이시면 됩니다.

오류가 뜬 장소(HKEY_LOCAL) 클릭-> 폴더에서 오른쪽 버튼누르시고->사용권한->고급->"부모가 개체가 가진..." 체크-> 확인->사용자권한창(아래참조)

 

뭐 이런 메시지가 뜨길레, 따라 했는데, “부모가 개체가 가진...” 뭐 이런 말도 컴퓨터에 있다는 게 참으로 신기하다. 그렇게 체크박스에 체크까지 하고 완료한 다음 다시 한글을 깔아 보았다. 문제 해결. 이렇게 간단한 것을!

아무튼 오늘 하루는 이 컴퓨터와 씨름 하느라 날 샜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로 포스팅을 마무리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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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확실하던 것들도 점점 희미해져 가지.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살다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아'라며 제딴엔 포용력 있게(?) 돌려 생각해 보는 제주도 생겼어.  좋게 말하면 겸손해지는 거지만, 더럽게 말하면 좀 비겁해지는 거였지.  적응? 좋지, 아주 좋은 말이야. 반항하고 개기는 후배들에겐 그런 말을 하곤 했었어. "적.응.하.라.고!!!' 그렇게 적응하지 못하고 순응하며 길들여졌던 우리 스스로가 말야. 

서른도 훌쩍 넘어 마흔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치기 어린 의혹으로 삶을 채우는 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줄 알면서도 그저 세상 돌아가는 것에 쉽게 눈돌릴 수가 없는 내 안의 어린 마음이 살포시 고개를 들더라. 그 마음 지긋이 눌러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정/말/ 곤혹스럽다.

오늘도 사람들과 모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촛불 이야기, 독도 이야기, 역사 이야기, 지금의 현실과 우리의 이상에 대한 이야기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주제를 어찌할 줄 모르다가 그만 내지르고만 내 그 허접한 말들에 내 스스로 치여 꾸물거리고 있는 이 밤. 비는 참 잘도 오지. 요놈의 입-방-정... 명박아~ 나 좀 조용히 살고 싶다...

한때 자칭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아이디를 참 좋아했더랬고, 그것을 싸이 미니홈피 제목으로, 네이버 블로그 제목으로 썼던 적이 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어디에서 흘러들어온 물이라도 바다로 흘러가는 걸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강물처럼 꾸준히 성실하게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이었을 거다.

하지만 강물은 그저 잔잔하게만 흐르지는 않잖아.  세상의 모든 도시는 흐르던 강물이 범람해서 만들어진 옥토 위에 세워졌어. 강물은 그렇게 도시를 만들었고, 도시는 강의 범람 위에 세워졌던 거지.

오래전 시골에서는 동네 개천이 물난리가 나서 넘친다 싶으면 나와서 막걸리를 먹으며 팔자좋은 구경을 했다지. 한해 농사야 망친다 싶어도 다음해 농사부터는 풍작이 기대되기 때문이었다잖아. 흐르는 강물은 가끔 땅을 욕심내고, 그 욕심이 땅을 더 비옥하게 한다는 거는 오래된 이야기지만, 지금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은 촛불의 민심이 강둑을 넘어 범람하고 있는 거야. 가둬두고 막아두고 통제하려 했지만 이미 어찌할 수 없을만큼 넘쳐 흐르고 있어. 지금 좀 불편하고 어렵고 힘들지만, 그 촛불 덕분에 우리는 다음 세상을 더 살만한 세상이 될 거라 기대하는 거잖아. 이거 아니었으면 이민 갔을 사람 많을걸? 하하하

난 그래서 지금의 촛불이 참 고맙고 사랑스러우면서도 미안해. 도덕을 팔아 양식을 챙기는 세상에 한몫했던 사람으로서, 스스로 참회의 촛불을 들 용기 조차 없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어두운 거리를 밝힌 촛불이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거야. 촛불은 더러운 세상에 깨끗한 한줄기 빛으로 고귀한 희생의 넋으로 우리에게 왔어.

오늘따라 이재무 시인의 <한강>이라는 시가 참 나에게 와 닿는다.





한강 

- 이재무-


강물은 이제 범람을 모른다
좌절한 좌파처럼 추억의 한때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는 크게 울지 않는다
내면 다스리는 자제력 갖게 된 이후
그의 표정은 늘 한결같다
그의 성난 울음 여러 번 세상 크게 들었다
놓은 적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약발 떨어진 신화
그의 분노 이제 더 이상 저 두껍고 높은
시멘트 둑 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오늘 권태의 얼굴을 하고 높낮이 없이
저렇듯 고요한 평상심, 일정한 보폭 옮기고 있다
누구도 그에게서 지혜를 읽지 않는다
손, 발톱 빠지고 부숭부숭 부은 얼굴
신음만 깊어가는, 우리에 갖힌 짐승 마주 대하며
늦은 밤 강변에 나온 불면의 사내
연민, 회환도 없이 가래 뱉고 침을 뱉는다
생활은 거듭 정직한 자를 울린다
어제의 광명 몇 줄 장식적 수사로 남아 있을 뿐
누구의 가슴 뛰게 하지 못한다 그 어떤 징후,
예감도 없이 강물은 흐르고 꿈도 없이 우리는 나이를 먹는다
찬란한 야경 품에 안은 강물은
저를 감추지 못하고
다만, 제도의 모범생이 되어 순응의 시간을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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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무엇보다 시민들의 위트와 풍자, 해학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전경 여러분, 이미 점호시간이 지났습니다. 지금 바로 해산하시고 숙소로 돌아가서 점호받으세요.
전경 여러분, 여러분이 이런다고 밥 더 주지 않습니다. 휴가, 더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선동당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을 선동하는 저 경찰들을 보세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불법을 행하는 동안, 여러분들을 선동하는 저 경찰관은 얼굴도 보이지 않는
안전한 곳에서 여러분들을 선동하고는 바로 도망가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 선동당하지 마시고 방패를 내려놓으시고 시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여러분의 가족과 형제 자매들입니다. 여러분의 미래의 부인입니다.
전경여러분, 여러분에게 명을 내리는 어청수의 아들은 군대면제입니다.
여러분들이 몸바쳐 지켜주는 명박이도 군대면제입니다."



무식한 사람을 이기는 것은 아는 사람이고,
아는 사람을 이기는 것은 열심히 하는 사람이고,
열심히 하는 사람을 이기는 것은 즐기는 사람이다.

무식한 이명박은 절대 시민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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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화면을 다음으로 바꾼지는 오래다. 촛불집회 이전부터 내 컴퓨터의 초기화면은 엠파스나 다음 둘 중의 하나였다. 네이버가 자사이기주의와 시장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못된 짓을 많이 해왔기 때문이다. 타사의 열린검색을 막는다든지, 정치적 댓글을 기사와 관계없는 엉뚱한 곳에 몰아놓는다든지의 정책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정보유통의 자유로운 흐름과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고 침해하는 행위다.


그런 와중에 이번에는 조중동이 다음에 뉴스를 공급하지 않겠다고 나왔다. 많은 네티즌들은 환영하는 분위기다. 심지어 미디어 다음을 ‘청정지역’으로 선포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컨텐츠를 제공받아 운영하는 포탈로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입장일 수밖에 없다.


조중동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 정보는 독점이 될 수 없다. 기본적으로 유통(흐름)의 과정에서 더욱 풍부화되고 정교하게 다듬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웹2.0의 정신이다. 독점을 통해 대중을 통제하고 압박하겠다는 것은 정보를 생산하는 주체로서 자살행위와 다름없다. 흐름이 막힌 정보는 썩기 쉽다. 지금까지 조중동이 내놓은 정보들이 유통의 과정에서 정화되었던 과정이 그렇다.


조중동은 아무래도 검색1위의 네이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자체적으로 그럴 만하다고 판단해 다음을 버렸을 것이다. 과연 네이버는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한나라당 모의원은 대선 과정에서 “네이버는 평정됐다”는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을 비롯해 여러 조치에서 네이버는 네티즌 대중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물론 네이버만 탓할 것은 아니다. 다음도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일에 소극적이다. 상업적 기업의 한계일 수도 있다. 정부의 인터넷 규제에 대해 최소한 헌법소원이라도 직접 내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네이버와 다음은 네티즌들이 다국적 기업 구글에 주목하는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네이버는 지금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는 조중동의 입장을 침묵으로 동조하다. 이전의 정책을 생각해 보아도 네이버는 분명 조중동과 비슷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억울하다고 항변하고 있지만, 부정과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 침묵하는 것, 그 자체가 불의와 부정이다. 지금 거리는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로, 사이버에서는 인터넷에 대한 유례없는 규제와 통제로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표방할 수 있다는 민주공화국의 기본 입장이 무너지고 있다. 이는 거리에서는 조중동과 검찰 경찰이 주도하고 있고, 인터넷에서는 네이버가 이끌고 있다. 이것이 지금 세상이다. 


생각해 보면 따로 블로그를 운영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일찌감치 네이버 블로그에서 떠났지만, 여전히 내 글들이 그곳에 남아 있다. 이번 조중동의 다음에 대한 압박에 대해 네이버가 어떤 정책을 내올까. 일말의 기대감을 가져보는 건 지나친 착각일까. 오늘부터 네이버 블로그의 내 컨텐츠를 하나씩 지워나갈 생각이다. 네이버가 변하지 않는 이상 이 행동은 계속될 것이다. 고심해서 쓴 글과 어렵게 찍은 사진들을 그곳에 놔두어 네이버에 한푼이라도 이익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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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놀고 있는 백수지만 평일에 늦잠을 자거나 낮잠을 자는 일은 없다. 그렇지만 요근래 감기에 걸려 골골 거리는데다가 감기약도 만만치 않은 놈이라 깜빡 잠이 들었다. 혼곤한 일요일 낮잠을 즐기는데 동네 앞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는 통에 깰 수밖에 없었다.

"야 이 이명박 같은 새끼야~"

우리나라 최대권력자, 대표자라는 사람이 이제 동네 아이들에게도 심한 욕지거리의 하나로 이용되고 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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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주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는 많은 의견들이 생성, 확장, 소멸의 과정을 거쳐 정제되기 마련이지만, 자칫 그런 과정을 거치지 못하거나 잘못 확장될 경우 집단에 매우 안좋은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특히 집단을 묶고 있는 것이 이성이냐 감성이냐는 그 결과에서 천지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집단 지성과 집단 감성은 다른 문제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시작된 집단 지성의 발현은 100만 촛불집회로 모여들었고, 이후 대운하, 공기업 민영화, 몰입교육 등 전반적인 이 정부 정책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다음 아고라는 참신하고 기발한 집회 아이디어를 내놓으며 집단 지성의 메카로 불리어 왔다.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내세우며 ‘닭장차 투어’ ‘물대포샤워’ ‘명박산성’ 등을 만들어내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물론 이런 충격은 촛불집회의 의미를 더욱 고양시켜냈다.


다음아고라는 언론운동으로 진화했다. 확연하게 보도태도의 변화를 보여준 조중동에 대해 시민들의 분노가 아고라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조중동 절독운동이 전개됐다. 이 와중에 한겨레나 경향에 대한 언론소비자들의 집단 광고 운동은 아마도 최고의 언론소비자 운동이 아닐까 싶다. 올바른 사회여론을 생산해 내는 언론에 자신들의 의견을 광고로 게재하려는 사람들의 운동은 포지티브 언론운동의 한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조중동에 대한 네가티브 운동에서도 새로운 국면의 전환이 전개됐다. 조중동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는 광고중지 압박 운동이 그것이다. 올바른 보도를 하지 않는 언론에 광고를 하는 기업들에 전화나 이메일, 게시판 글쓰기를 통해 항의하는 활동을 통해 광고 중지 압력을 넣는 것은 집단지성이 발견한 획기적인 아이디어 중 하나이며, 실제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운동은 좀더 확장되고 있다. 바로 올바른 기업에 대한 지원과 잘못된 기업에 대한 반대 운동이다. 소비자 권리찾기라고도 볼 수 있는 이 운동은 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아고라 등에 수시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미국쇠고기 문제가 궁극적으로 소비자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한 운동인만큼 기업에 대한 소비자 권리 찾기 운동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 과정에서 삼양과 농심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잘못된 정보와 논리는 집단지성이 아니라 집단 감성을 키웠다. ‘너트가 들어간 라면이라도 괜찮다’는 논리는 광우병 가능성을 우려하며 일어난 소비자 운동의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지성은 없고 감성만 남았다. 농심을 죽이기 위해 삼양을 띄우다 보니 일어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백번 양보해서 삼양이 좋은 기업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은 지나친 신화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규영의 글은 그런 면에서 꽤 적절하고 강렬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자극적인 면도 있고, 또 그 이면에 대한 고민은 없다는 점이 아쉽다).


지금의 아고라는 집단 지성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면이 많다. 오히려 집단 감성에 휘둘려 하나의 편향에만 열광하고 있다. 정당한 의견개진에 대해서 자신들의 생각과 좀 다르다고 ‘알바’로 몰아세우는 것은 지성이 아니다.


나는 다음 아고라가 집단 감성에서 벗어나 냉철한 집단 지성의 기능을 다시 되찾기 바란다. 그래야 주성영 같은 꼴통에게 ‘집단 마오이즘’ 같은 별 같지도 않은 말을 들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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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시절 감기는 좀 참으면 나았다.
혹은 약국에서 대충 지어준 감기약만 먹어도 낫는 가벼운 질환에 불과했다. 그러나 30대 중반에 접어드니 몸의 저항력이 예전 같지는 않나 보다. 지난 월요일 K선배와 밤늦도록 진하고 거칠게 술을 마신 후로 감기 기운이 오더니 급기야 몸살까지 찾아와 앓아눕게 만들었다.


어제는 간신히 일어나 병원을 찾아갔다. 젊은 의사 선생은 이런저런 문진을 하고 목과 코와 귀를 살피더니 목이 많이 부었다고 한다. 처방전을 받고, 나오는 길이 참 씁쓸하다. 하는 일도 없이 술 때문에 몸을 혹사시키는 짓을 했으니 부끄럽기도 하다. 나름대로 건강을 잘 챙긴다고 자부했으면서도, 한순간 흐트러졌던 그 틈으로 찾아온 감기에 이렇듯 맥을 못추고 말았다.


20대에는 따로 운동을 안 하다가, 30대가 되면서 자전거니 수영이니 하는 것들을 하기 시작했지만, 사소한 여름감기도 못 피해가고 말았다. 세상살이의 두려움도, 나이듦의 쓸쓸함도, 뼈저리게 느끼는 30대의 삶. 도대체 40대, 50대의 삶은 어찌 견뎌나갈 수 있을까. 부모님들이 참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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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쓰고 나니 어떤 표현이 맞나 궁금하다.
'물이 새다'가 맞는지 '물이 세다'가 맞는지...
맞춤법이라는 게 이렇게 작대기 하나 점 하나 차이로
의미가 달라지는 거라 조심스러울 때가 많다.
아무튼 여기서는 '천장에 물이 새다'라고 썼다.
문맥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여지도 있으니 말이다.

동생이 작은 방에서 소리를 질렀다.
들어가 보니 바닥에 물이 흥건하다.
물이 바닥에서 올라올 리는 없고,
아마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 바닥에 번진 것일 텐데,
짐작할만한 곳을 찾아봐도 쉽게 보이지 않았다.
의자를 놓고 책상에 올라가니 그제서야 구석진 곳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게 보인다.
일부는 벽을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급하게 물을 받을 그릇을 받쳐놓았다.
물이 어떻게 새고 있는지 알수 없다.
윗집에서 어떤 공사를 벌였는지도 모른다.
우선은 작은 방의 세간들을 치웠다.
그리고 윗집에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저녁무렵, 윗집 주인이 찾아왔다.
상황의 심각성 때문인지, 심각하게 지켜보다가 곧 수리를 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새어나온 물 때문에 더럽혀진 벽지는 어쩌나.

이웃사이에 이런 문제들은 잘못되면 심각하게 얼굴 붉어질 일로 번질 수도 있다.
윗집과 아랫집 사이에는 층간소음문제도 심각하다.
시도 때도 없이 쿵쿵 거리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쫓아 올라가 따지는 것도 괜한 시비거리만 남기게 된다.
사실 우리집안 식구들의 발걸음도 킹콩 못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일은 너무 가깝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닐까.
가족이 아니면서 가족처럼 바로 옆에 혹은 아래에 혹은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들로 인해, 때로는 나로 인해 빚어지는 어쩔 수 없는 부딪힘,
이런 것들이 이웃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장벽이 되고는 한다.
그래서 아파트나 도심 빌라의 삶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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