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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스토리 IP제한 공지(http://notice.tistory.com/1686)가 뜬 이후 나에게도 해당되나라는 의문점을 가졌지만 적극적으로 알아보려 하지 않아서 그만 내 블로그가 사라져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버렸다. 물론 티스토리 홈페이지를 통해 로그인해서 들어오면 여전히 살아 있지만 1차 주소를 www.eowls.net으로 해 놓았던만큼 이 주소로 들어오면 없는 페이지로 나온다. 그러니까 지난주 금요일부터 사라져버린 블로그를 소생시키기 위한 내 노력은 나름 눈물겨웠다.
  • 나름 자부하고 있던 블로그 주소이지만 사실 블로그 작업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니다. 글쓰는 것에도 마음을 써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회사 업무에 가정사 챙기는 일까지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마흔을 앞둔 생활인의 한계라는 것도 있지 않을까라는 위로를 던졌다.
  •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일, 생각과 상념을 차분히 정리하는 일도 블로그가 있는 이유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까이는 일도 많이 봐왔고, 인터넷 세상에서 개인정보가 어떤식으로 유출되는지 잘 알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것도 있지만, 그러다 보니 정작 글이 가지고 있는 성찰의 힘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 세상의 화두는 '쫄지마'가 되고 있다. 세상의 온갖 강요된 질서에 쫄대로 쫄아버린 지금의 30~40대에게 저 말은 얼마나 용감한 말인가. 그 '쫄지마'가 대상으로 가지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고, 나꼼수는 '가카'를 그 정점으로 보고 있지만, 실상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가카'는 멀리 있고, '상사'는 가까이 있는 존재다. 태고적부터 쌓여져 온 직업 내의 권위의식이나 사회의 줄세우기 관행 등이 우리를 스스로 쫄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 글을 쓸 때 언제부턴가 자기 검열에 빠져들 때가 많다. 이것을 쓰면 누군가가 보고 사회(회사나 국가 등)에서 불이익을 받는 것은 아닐까. 그로 인해 벼라별 구설수에 휘말리고 소송에 휘말리고, 맘고생 몸고생 개고생을 사서하지 않을까 등등.
  • 아무튼 나도 그만 쫄고 싶다. 그 시작을 블로그를 부활시키는 것에서 시작해야지. 벼라별 말들을 아주 읽기 힘들고 쬐그마한 글씨들로 주저리주저리 나불대 보자. 읽는 사람 피곤하게 하는, 가독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내멋대로 글장난을 즐겨보자. 사실 블로그라는 것은 그런 나불거림의 장난질 기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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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부, 혹은 파출부, 때로는 식모라고도 불렸다. 지금은 간혹 가사도우미라고 불리기도 하며, 전문직업인의 느낌이 나는 가정관리사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직업이고, 여전히 저임금이며 고강도 노동에 처해 있고, 사회 안전망의 바깥쪽에 있는 직업군의 하나다.

돌봄 노동(육아, 식당, 청소 관련 업무)은 그 가치에 비해 천대받으면서 위협받고 있다. 우리 사회의 천박한 인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던 드라마 “로맨스 타운”에서 부잣집 아들 강태원은 자신의 집 가정부 노순금에게 이렇게 말한다.

“비위도 잘 맞추고 눈치도 잘 보고, 때론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남은 밥 남은 반찬 먹어치워 음식물 쓰레기 안 생기게 하고, 자기 처지 알고 주제 알고 몸 낮춰 빠질 줄도 알고 입 다물 줄 알고.”

표현이 지나치다는 비판을 받은 내용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의 천박하고 저열한 인식을 생생하게 드러냈다는 지지도 받고 있다. “로맨스 타운”은 그만큼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계급적 차별의식을 담아내려는 시도와 돈 앞에 무너지는 위선적인 인간들의 모습을 잘 드러낸 수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맨스 타운”은 뿌리 깊은 계급적 차별의 지점을 순진한 낭만적 상상으로 뛰어넘으려 한다. 노순금이라는 순수하고 착하고 성실한 캐릭터의 노력으로 식모들 사이의 우정을 되찾고 왕자님(강태원)과의 사랑도 성취한다.

하지만 영화 “헬프”는 "로맨스 타운"의 한계에서 더 나아가서 반갑다. 저항하는 흑인에 대해 무법적인 살인과 테러가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사회, 모든 법질서가 백인에게 유리하고 흑인을 억압하고 있는 사회에서 흑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극히 좁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용기를 낸 가정부들을 중심으로 끌고 왔다. 힐리를 중심으로 하는 상류층 백인 여성들과 스키터 엄마 등이 가진 위선적인 모습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계급적, 성적, 인종적으로 가장 열악하고 인간적 권리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하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을 냄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사회의 모순을 고발한다는 내용은 “로맨스 타운”의 한계를 뛰어넘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잘못된 사회 시스템은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에이블린(흑인 주인공)이 힐리(인종차별주의자)에게 던지는 마지막 절규, “이제 그만하세요. 지겹지도 않으세요.”와 흐느끼는 힐리의 모습은 결국 흑인이든 백인이든 인종 차별의 거대한 벽에 모두 갇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벽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용기를 보여달라는 영화 “헬프”.

영화는 거의 두시간 가까운 분량이지만, 영화 내내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유쾌하고 재미있는 미니와 애절한 아픔을 간직한 에이블린, 상큼발랄한 작가 지망생 스키터가 보여 주는 다양한 재미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미국에서 3주 동안이나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했을 정도였으니 재미라면 걱정하지 말고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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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뜯어먹고 사는 거 아니다.”

어머니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다 큰 아들이 늦은 나이에도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아마도 턱없이 높은 외모에 대한 기준 때문이라고 보셨을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난 내 기준에서 매우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살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아름다움은 꼭 외모만을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하고 같이 살다 보면 자잘한 긴장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다. 남편이란 작자가 금요일 후배들과 새벽까지 술을 먹다가 들어와서는 토요일 온종일 뒹굴뒹굴하며 보내고 일요일마저 집에서 게임만 하고 있으니, 모처럼의 휴일이 맥없이 그냥 가는 게 못내 아쉬웠을까. 아내는 부산스럽게 외출 준비를 했다. 초췌한 내 몰골 때문인지 아니면 나에게 화가 났는지, 나에게 나가자는 말도 안 하고 민서를 데리고 개웅산에 다녀오겠다는 거다. 일단 아내 얼굴에서 노랑 신호등(주의)에 불이 들어왔다는 신호다.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그냥 내보내면 난 죽는다.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이틀 내내 비가 내린 터라 나는, "비 온 뒤라 개웅산 온통 진흙길일 거야. 잠깐만 기다려. 민서 자전거 끌고 안양천에 같이 나가자."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아내는 화가 나도, 잘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다가도 시간이 지나고 속으로 삭이면서 풀어낸다. 짜증 내며 징징거리는 민서와 컴퓨터 앞에만 앉아서 게임만 하는 나를 보면서 내심 많이 답답했나 보다. 안양천을 나와 가을의 둔치를 걸어 다니다가 고척교 아래 마련된 메밀밭에서 잠시 쉬는 그의 얼굴에 여유로운 웃음이 떴다. 다 풀어냈구나.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간은 관계를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외모를 보기 위해서는 거울만 있으면 되지만 자신의 마음을 보기 위해서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를 통해서 내 마음의 저 깊은 곳까지 볼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통과해야 할 첫 관문인 것이다.

하지만 타인과 맺는 관계를 자신의 문제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변질시키기도 한다. 이 사람한테는 이래도 되겠지, 이 사람은 이러는 나를 이해할 거야, 하는 마음은 자신의 문제를 상대방에게 떠넘기기 위한 기만이다. 이는 깊은 관계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오래된 인연이 이런 이유로 돌아선다.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제를 떠넘기는 게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똑바로 직시하는 객관적 자아를 형성하는 것에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믿는다. 때로는 끊어질 듯한 긴장감을 형성하는가 하면, 때로는 느슨한 무관심을 지속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끈의 길이는 약간 길었으면 좋겠다. 그 사이에서 바람이 무심히 지나가고 그 바람 사이로 서로의 체취를 맡으며 언제나 그리워할 수 있도록 말이다. 곁에 있어도 네가 보고 싶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런 그리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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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항상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한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새롭게 길이 나면 그곳에서 제를 올렸다. 길은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출구이면서 낯선 것들이 공동체로 들어오는 입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좋은 것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고 공동체는 밖으로 번창하라는 의미를 제에 담았다.

중앙선의 복선화로 새롭게 자전거길이 뚫렸다. 사실 길이 "새로" 뚫렸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이미 있던 길을 자전거 길로 바꾸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철도 중앙선의 역사는 멀리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만주 침략과 한반도 수탈의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중앙선을 건설했다. 1936년 일제가 밝힌 건설 목적에서는 “반도 제2의 종관선을 형성함으로써 경상북도·충청북도·강원도·경기도 등 4도에 걸치는 오지 연선 일대의 풍부한 광산·농산 및 임산자원의 개발을 돕고, 지방산업의 발달을 촉진하는 동시에 격증하는 일본(日)·조선(鮮)·만주(滿)의 교통 연락, 객·화의 수송 완화를 도모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각주:1]  철마가 달리던 길을 이제는 두 바퀴를 굴리며 달리는 자전거들의 질주로 채웠다. 억압과 착취의 도구였던 길이 놀이와 낭만의 길로 바뀐 것이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였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는 아마 이런 때에 쓰는 말일 것이다.

용산역에서 6시 45분 용문행 전동차. 맨 앞칸과 뒤칸에는 자전거를 싣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앞칸에만 해도 20여 대의 자전거로 채워졌다. 거기에 레저용 자전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할아버지의 자전거는 짐받이에 마른 풀더미가 있었는데, 할아버지 말로는 약재에 쓰이는 거라서 돈을 많이 받는단다. 지금도 자전거를 싣고 밭에 나갔다가 다시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이 노인 외에도 밭에 나가신다는 중년의 아저씨와 또 다른 노인도 생활 자전거를 전동차에 실었다. 일요일이라 놀러 가는 자전거들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분들의 자전거는 화려한 자전거들 틈에서도 유난히 돋보였다.

용산에서 출발해 약 1시간 반 만에 양평에 도착했다. 양평역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길을 바로 찾기는 어려웠다. 편의점에 들어가 물어서 겨우 자전거길에 올라갔다. 길은 아주 잘 닦여 있었다. 아스팔트를 덮은 철도 길은 부드러운 페달의 느낌을 다리에 전해주었다. 이제는 기차가 지나지 않아 버려질 뻔했던 능내역은 자전거들의 휴식 공간으로 변했다. 젊은 시절 모꼬지 장소로 대성리 다음으로 자주 찾았던 능내역이 이렇게 변하니 기분이 묘했다. 철도의 레일도 철길을 덮었던 자갈들도 저마다의 독특한 운치를 주었다. 산을 뚫어 만든 9개의 터널도 자전거길의 하나다. 교각은 반반한 나무판자를 깔아놓았다. 판자 위를 달리는 자전거로 달그락거리는 나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다. 이 모든 것들이 한강 자전거 길에서 만날 수 없는 양평 자전거길의 재미다.

반면 급커브길이 많고 언덕길도 많았다. 자전거 초급자나 아동들에게는 쉽지 않아 보인다. 터널 안도 생각보다 어둡다. 안전사고에 유의해야 한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자전거 길 관리가 제대로 이어질지도 걱정이다. 사람이 오가는 자리는 아무리 조심스러워도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관리가 부실하면 금방 망가지기 쉽다. 게다가 자전거 도로는 지역 지자체가 직접 관리할 텐데, 안양천만 해도 동네마다 지자체 사정에 따라 길의 상태가 다르다. 양평이나 남양주의 재정 상태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자전거 도로 관리도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뉴스를 보니 하루 전 팔당댐 인근 양서문화체육공원에서 '남한강 자전거길 길트임 기념식'이 있었다. 여기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4대강(사업)은 강을 주민들에게 돌려주는 사업을 해야겠다고 해서 하는 것"이라며 "소수가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반대한다."고 말하면서 "국민들은 절대 환영"이라고 언급했다.

4대강 사업은 크게 보 사업과 준설 사업, 그리고 강변 주변 사업으로 나누어진다. 따라서 자전거 길도 크게 보면 4대강 사업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양주길 구간은 예전 폐철도를 이용해 마련한 자전거 도로다. 따라서 이 구간은 4대강 사업과 관련성이 없다. 물론 이 길이 나중에 강을 따라 연결되는 전국 자전거 도로망에 포함되므로 그 시작점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4대강 사업을 억지로 녹색 사업으로 포장하기 위한 꼼수다. 많은 자전거 전문가들이 레저로서의 자전거 문화보다 교통수단으로서 도심내 자전거 도로 확보가 더 시급한 녹색 사업임을 지적하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4대강 사업으로 쫓겨난 농민만 2만 4천여 농가에 이른다. 남양주길 한가운데에 있는 두물머리에서는 현장 농민들이 지금도 계속 저항하고 있다. 이곳의 사업 공정률은 0%라고 한다. [각주:2] 이명박 대통령은 항상 그래왔듯이 이곳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농민들과 인권환경단체들은 국민이 아니었다.

프레드 피어스의 '강의 죽음'이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수문학자와 공학자들은 강과 관련된 수많은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결론 내렸다. 흐르는 강물의 위력과 콘크리트가 정면으로 대치하면 언제나 콘크리트가 패배한다. 한 곳에서 홍수를 막으면, 다른 곳에서 더 자주 홍수가 일어난다. 공학자들이 강을 다스리려는 시도는 자연과 함께할 때, 자연의 요구에 순응할 때만 성공을 거둘 수 있다." [각주:3] 멀리 볼 필요도 없이 올여름 많은 비 때문에 한강과 그 지천들, 지방의 많은 하천의 둔치에 만들었던 수많은 구조물과 자전거 도로들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를 본다면 지금 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사업이 얼마나 허울 좋은 껍데기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이번에 새롭게 뚫린 자전거길은 무척 반갑다. 하지만 또한 슬프다. 반갑게 맞아들이고 즐겁게 달려야 할 그 길에 묻어 있는 이 수많은 이야기와 애환들을 언제쯤 세상에서 알아줄까.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길은 길이다. 길을 통해서 기쁨과 즐거움도 들어오지만, 전염병과 전쟁, 폭력들이 들어올 수도 있다. 우리가 지금 만들어놓고 달리는 이 자전거 길이 언제나 평화와 행복을 전해주기를 바라면서도 또 다른 욕심과 욕망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이유다.



















  1. 네이버 지식사전 "중앙선"에서(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61346) [본문으로]
  2. 인권오름-4대강 사업 공정률 0%, 팔당 두물머리를 지키자 [본문으로]
  3. 이정환닷컴-"4대강, 토건국가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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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을 넘기면 자기 얼굴에 살아온 인생이 드러난다는 말이 있더라. 그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나이도 이제 마흔이 낼모레다. 어찌됐건간에 나이와 인생에 얼굴에 드러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좋은 얼굴을 가지고 싶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의 얼굴 표정을 본다. 뽀얀 얼굴에 드러나는 다양한 표정에 매번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게다가 이제는 자아가 생기는 시기라서 그런지 감정을 얼굴에 싣는 것이 점점 다양해지고, 어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나름의 표정 연기도 점점 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어린 아가의 애교라는 게 그런 게다. 억지 울음이나 억지 웃음도 짓는데, 그런 표정을 보고 있자면 웃지 않을 수 없다. 아기야 그것을 어른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보다 자기가 원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한 행위였음에도 우선 어른들에게 웃음을 준다. 아이가 주는 행복 중의 하나다.

민서도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직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해 대화를 통한 자기 표현이 어색해서일까. 그 표정들이 정말 다양하다. 심지어 사진 찍자며 웃어 보라면 억지 웃음까지 짓는다. 그 억지 웃음이라는 게 입만 살짝 벌리고, 눈만 살짝 감은 듯 뜬 듯 한 상태로 있는 표정이라서 어찌나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억지 울음도 그렇다. 원하는 걸 안 들어 주면 억지로 우는 울음을 운다. 소리만 "앵~" 할 뿐 눈물 한방울 나오지 않는다. 입가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소리만 내는 억지 울음도 재미있기는 마찬가지다.

민서 엄마에게는 독특한 버릇 하나가 있는데, 눈이 나쁘다 보니 양미간에 주름을 잡고 힘을 주면서 시선을 주는 것인데, 요새는 이것도 따라해서 걱정이다. 그래서 민서 엄마도 이 버릇을 고치기로 마음 먹고 있다.

강아지 인형이 있는데, 이 강아지 인형이 얼굴은 정면을 향하면서 눈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민서는 이 모습도 따라하는데, 마치 눈을 흘겨보는 것 같은 표정이다. 이 표정이 익숙해져서인지, 언제는 아빠가 좀 장난을 치니까 눈을 흘겨보듯이 쳐다보다가 팽하고 엄마한테 가더라. 순간순간이 놀랍다.

민서가 많이 웃어주길 바란다. 그 웃음의 미학이 얼굴에 항상 깃들어 있어서 행복한 아이가 되기를 바란다. 덕분에 나도 많이 웃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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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내가 좀더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일만 하다가 도살장에 팔려간 말 복서가 생각난다. 사실 이 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 중의 하나다. 때로는 '성실' 때로는 '희생'으로 떠받들어지지만, 사실은 '무기력'의 다른 말일 수도 있고, '대안없음', '출구없음'의 비슷한 말이기도 하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체제와 시스템에 대한 무지는 결국 우리에게 성찰 없는 '희생'과 비판 없는 '성실'만을
요구할 뿐이다. 이런 체제가 바라는 것은 저항 없는 '무기력'의 상태이다.

길가에서 걸인이 굻어죽어도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유죄다. 하물며 생때같은 어린 목숨들이 고작 성적 때문에 제 목숨을 아스팔트 위로 던져버려도 꿈쩍도 안하는 나라에서 사는 우리 모두는 지금 무기력하다.

선거로 사람을 잘 뽑자는 이야기도, 나만 잘 하면 된다는 말도, 결국은 그 무기력 속에서 희망도 출구도 없는 세상을 향한 헛발질에 불구하다. 무지와 무기력은 결국 권력의 타락을 부추기고 방조하는 일이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을 오가는 정치권력이 내온 결과는 처참할 뿐이다. 모든 불행한 일은 언제나 외부의 적(대부분 북한, 때때로 중국) 때문이라며 외치는 보수 언론은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 국민의 충견이 아닌 권력의 충견 노릇을 하는 검경부터, 체제에 순화되어 법의 정의를 고민하기 보다 승진과 권력에 욕심을 부리는 판사들, 빈곤의 그늘을 키우기에 여념없는 부자들, 교육의 숭고한 가치를 버리고 지식 장사에 나선 사학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안주하며 자신의 욕심만 채우고 있는 정치가들. 이 모든 것들이 나와 당신이 만든 그 '성실'과 '희생'이 만든 댓가다.

권력을 탐해 그에 아부하거나 기생하려는 자들이 넘쳐나는 사회는 곧 전체주의 사회이며 파시즘 사회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무지에서 벗어나고 무기력을 깨지 않는다면 공포의 마왕이 하늘에서 내려와 모두를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끔찍한 미래를 막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무잇일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그 해답을 마련해 놓고 있다. 




동물농장(세계문학전집5)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조지 오웰 (민음사, 2009년)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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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들이 기억 속에서 쉽게 잊혀진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상흔으로 남아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히는 일이 될 수 있다. 곽노현 교육감의 일이 그렇다. '선의란 무엇인가' 그는 구치소에 갇히기 전에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의 '선의'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교육을 살리기 위해 나선 동지이자 경쟁자를 향한 개인의 측은지심의 발의는 분명 존경할 만한다. 하지만 법이 측은지심의 마음을 인정할 수 있을까? 법의 판단이 어떻게 나오든 그의 행동은 그렇게 쉽게 '선의'로 인정될 수 없는 선이 있고, 유감스럽지만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은 것이다.


박명기-곽노현 모두가 댓가성을 인정하지 않는 돈이다. 두분 모두 '선의'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선의'는 법정에서 실체가 없는 주관적 의지일 뿐이다. 법정에서는 분명 통장의 잔고와 돈의 흐름을 따지지 '측은지심'의 기준이나 선의 발의에 대해 따지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최종적인 선고에서 판사의 재량에 따라 어느정도의 정상참작의 선에서 고려될 수는 있겠지만 유무죄의 기준에서는 고려 대상이 될 수 없다. 무엇보다 '선의'가 현대적 '정의'의 심판대에 선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선의'를 잘못 이행해 벌어진 결과다. 아쉽지만 법정에서 '선의'가 설 곳은 피고인이 설 증언대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다. 이번 사건에서도 드러났지만 진정한 '선의'는 과정과 결과 그리고 그 영향에서 모두 긍정적인 에너지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선의'는 '선행'과 맞닿아야만이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다. 곽노현의 '선의'를 '선행'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재판의 결과를 봐야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우리 사회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결과를 내놓고 있다. 그래서 그 '선의'를 '선의'로 인정하기가 어렵다. 물론 곽노현 교육감을 구하기 위한 시민사회의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댓가성이 아니라는 곽-박 교수의 주장을 믿으면서도 최종 판단이 어찌 내려질지 아무도 자신할 수 없는 이유가 있지 않은가. 아직 법의 정의가 어떻게 내려질지는 미지수다.


곽노현 교육감의 '선의'는 박명기 교수를 향한 '선의'에서 머물렀다. 그 방법과 과정에서 여러 가지 사회적 오해를 살만한 일이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사회 공동체를 향한 '선의'와는 관계가 멀다. 곽노현 교수에 대해서는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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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14일 밤 7시 30분 -

"괜찮으세요?"
"으... 다리에... 다리에 쥐가 난 거 같아요?"
재빨리 그의 신발 앞코를 위로 꺾고 무릎을 아래로 눌러 다리를 똑바로 폈다. 힘껏 꺾고 눌렀는데도 쥐가 난 다리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빠른 대응 때문인지, 그의 다리는 곧 내 힘에 수그러들었고 그의 고통도 멎었다.
"오랜만에 뛰는 거라서 그럴 거에요."
"네, 정말 힘드네요."
"여기 있는 사람들 다 그랬어요. 저도 첫날에는 쥐도 났고, 다음 날에는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쑤시고 그랬죠."

- 1시간 전, 6시 30분 공덕 초등학교 실내 체육관 -

조용한 체육관에 불이 켜졌다. 사람들은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었다. 무채색과 강렬한 컬러의 운동복들이 교감한다. 가볍게 체육관을 도는 사람, 스트레칭을 하는 사람, 공을 꺼내며 퉁퉁 바닥에 튀어보는 사람, 모두 저마다의 몸풀기가 시작됐다. 난 스트레칭을 하고 체육관을 다양한 형태로 뜀뛰기를 한 후, 운동장으로 나가 2바퀴를 돈다. 일주일에 한번 있는 농구동호회 모임은 이렇게 시작된다. 

여러 개의 농구공이 번갈아 튀는 소리와 심장의 방망이질 소리가 비슷해지면 경기에 임할 준비가 끝난다. 이날은 편집부서에서 신입직원 2명이 합류해 총 9명이 동호회에 참석했다. 먼저 3:3 반코트. 지는 팀이 떨어지는 경기. 대개는 가위바위보로 팀을 가른다. 복불복, 누구와 팀이 되든 최선을 다한다.

농구 동호회에서 개인의 실력을 상중하로 나눈다면, 나는 하급 수준이겠다. 무엇보다 야투 성공률이 너무 낮고 돌파와 드리블 능력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나마 자신있는 부분은 넓은 시야와 부지런한 공간 침투, 그리고 빠른 패스 등이다. 슛이 부정확하니 적절한 패스를 통한 어시스트에 집중하고, 드리블이 안되니 부지런히 움직이며 공간을 만들어 낸다.

어제도 총 5 경기 정도(2시간 반)를 하면서 고작 3골을 넣었다. 이전의 어느 때보다 가장 좋지 않은 성적이다. 물론 점수나 승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느 경기든, 집단으로 하는 경기에서는 골보다 팀에 얼마만큼 기여하느냐를 따지는 게 중요하다는 게 평소의 지론이었기에, 그런 기준에서 본다면 중간 정도는 했다.

3게임 정도 마무리 됐었을 때 위의 상황이 발생했다. 처음 오는 회원들은 대부분 격하게 진행되는 우리의 경기를 따라오거나, 평소에 쓰지 않던 근육들을 과하게 쓰면서 부상을 입거나 쥐가 나기도 한다. 평소에 운동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2시간 반 정도가 지나면 온몸에 피로감이 몰려오고, 옷은 땀으로 흠뻑 젖는다. 씻을 만한 장소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서 대충 씻고 옷 갈아입고 집으로 가야 한다. 밤 9시가 되서야 집으로 나서니 피곤이 이만저만이 아닌데도, 다시 동호회 모임이 오면 아침부터 운동복을 챙기는 모습이 생소하지가 않다.

일주일에 한번 하는 농구동호회 모임에 건강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간혹 새로오는 분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예전 모습을 오버랩해보면, 지금의 내가 많이 나아지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운동의 중요성은 정작 할 때는 짐작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몸이 서서히 달아오른다.

나는 몸을 지배한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다만, 우리의 몸은 언제나 관리를 필요로 한다. 단순히 몸매를 가꾸는 문제만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볼 지점들이 많다. 농구동호회는 항상 그런 화두를 나에게 던져주는 좋은 멘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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