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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30일 안양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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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1인극 '콘트라베이스'를 본 적이 있다. 명배우 명계남이 혼자 두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독백을 통해 연극이 전개된다. 캐릭터의 독창성과 이야기의 치밀함, 그리고 배우의 캐릭터 이해와 그에 따른 몰입도가 굉장히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소모되고 재미가 없으며, 외면받기 쉽다. 그만큼 어려운 극이 1인극이다. 그렇다면 2인극은 어떨까?

지금 대학로에서는 열한 번째 2인극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그 일환으로 전개된 위드블로그의 이벤트에서 당첨된 나는 아내와 함께 2인극 페스티벌에서 선보이는 연극 "덤 웨이투"와 "마당극 심청의 이야기"를 '정미소'라는 임시 소극장에서 관람했다.

"덤 웨이터"는 2명의 극단적인 캐릭터들이 팽팽한 긴장감을 갖추면서도 희화화되고 유머러스한 상황을 연출하면서 극을 전개한다. 1인극에 비해 2인극은 분명한 대립적 갈등 구조를 가지는 2명의 캐릭터가 눈길을 끈다. 하지만 "덤 웨이터"가 가지는 이야기의 서사적 탄탄함은 좀 아쉽다. 도대체 이 두명의 캐릭터가 왜 그 방안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으며 왜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지 나오질 않는다. 그저 한명이 그 상황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는 것만이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간의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이 연극의 소개에서 보면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아이디어를 가져 온 것 같은데, 사실 사전 지식 없이는 이 연극을 본다는 것은 조금 곤혹스럽기도 하다.

물론 연극에서의 긴장감과 스팩터클함,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여러 장면들, 대립되는 인물 구도의 설정,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 등은 꽤 훌륭했다. 여기에 이야기의 사사적 측면만 조금 더 보강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 다음으로 본 "이야기 심청"은 전통적인 마당극 형식을 빌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마지막에 나는 징을 들고 아내는 그 징을 치는 일에도 참여했다. 마당극은 자고로 관객과 놀이꾼(배우)이 함께 할 때 그 효과가 최고조에 달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전 연극인 "덤 웨이터"의 극도의 연극적 긴장감을 완전히 풀어 해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덤 웨이터"를 본 사람들이 그대로 남아서 "이야기 심청"을 보았던 터라 극과 극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을 느꼈으리라.

"이야기 심청"의 재미는 물론 "덤 웨이터"를 뛰어넘는다. 아주 전통적인 고전을 약간 각색하고 다르게 생각해 보자는 제안으로 극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의 궁금증을 불러와 극을 이끌어 간다. 2명의 배우가 보여주는 다양한 연기와 재미있는 물건을 이용하여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데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극적인 재미는 덜했다. 막과 장이 없이 매번 병풍 뒤로 왔다갔다 하는 방식으로 등장과 극의 전환을 바꾸는 것은 연극의 전통적인 막과 장의 구별에서 올 수 있는 기대감을 씼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문화 공연을 보고 난 후의 느낌은 다를 것이다. 좋지 않은 감상 후기를 그것도 마감 이후 이렇게 뒤늦게 내놓았지만, 그럼에도 "야, 잘 보았다!"고 외치고 싶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에 내려와서 한 그 일성처럼 보는 내내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박장대소도 하고, 졸기도 했지만 이런 일이 어디 흔한 일이랴. 내 인생은 내 아내와 함께 하는 2인극의 그 절정임을 그날따라 유난히 느끼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수확이 있겠는가.

미천한 블로그질을 하고 있는 나에게 이런 기회를 준 위드블로그 측에 더없이 감사드리며, 더불어 연극 문화 발달을 위해 애쓰고 있을 관계자들과 2인극 페스티벌 관계자들에게 더불어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저는 건강한 리뷰문화를 만들기 위한 그린리뷰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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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스토리 IP제한 공지(http://notice.tistory.com/1686)가 뜬 이후 나에게도 해당되나라는 의문점을 가졌지만 적극적으로 알아보려 하지 않아서 그만 내 블로그가 사라져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버렸다. 물론 티스토리 홈페이지를 통해 로그인해서 들어오면 여전히 살아 있지만 1차 주소를 www.eowls.net으로 해 놓았던만큼 이 주소로 들어오면 없는 페이지로 나온다. 그러니까 지난주 금요일부터 사라져버린 블로그를 소생시키기 위한 내 노력은 나름 눈물겨웠다.
  • 나름 자부하고 있던 블로그 주소이지만 사실 블로그 작업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니다. 글쓰는 것에도 마음을 써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회사 업무에 가정사 챙기는 일까지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마흔을 앞둔 생활인의 한계라는 것도 있지 않을까라는 위로를 던졌다.
  •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일, 생각과 상념을 차분히 정리하는 일도 블로그가 있는 이유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까이는 일도 많이 봐왔고, 인터넷 세상에서 개인정보가 어떤식으로 유출되는지 잘 알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것도 있지만, 그러다 보니 정작 글이 가지고 있는 성찰의 힘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 세상의 화두는 '쫄지마'가 되고 있다. 세상의 온갖 강요된 질서에 쫄대로 쫄아버린 지금의 30~40대에게 저 말은 얼마나 용감한 말인가. 그 '쫄지마'가 대상으로 가지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고, 나꼼수는 '가카'를 그 정점으로 보고 있지만, 실상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가카'는 멀리 있고, '상사'는 가까이 있는 존재다. 태고적부터 쌓여져 온 직업 내의 권위의식이나 사회의 줄세우기 관행 등이 우리를 스스로 쫄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 글을 쓸 때 언제부턴가 자기 검열에 빠져들 때가 많다. 이것을 쓰면 누군가가 보고 사회(회사나 국가 등)에서 불이익을 받는 것은 아닐까. 그로 인해 벼라별 구설수에 휘말리고 소송에 휘말리고, 맘고생 몸고생 개고생을 사서하지 않을까 등등.
  • 아무튼 나도 그만 쫄고 싶다. 그 시작을 블로그를 부활시키는 것에서 시작해야지. 벼라별 말들을 아주 읽기 힘들고 쬐그마한 글씨들로 주저리주저리 나불대 보자. 읽는 사람 피곤하게 하는, 가독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내멋대로 글장난을 즐겨보자. 사실 블로그라는 것은 그런 나불거림의 장난질 기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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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부, 혹은 파출부, 때로는 식모라고도 불렸다. 지금은 간혹 가사도우미라고 불리기도 하며, 전문직업인의 느낌이 나는 가정관리사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직업이고, 여전히 저임금이며 고강도 노동에 처해 있고, 사회 안전망의 바깥쪽에 있는 직업군의 하나다.

돌봄 노동(육아, 식당, 청소 관련 업무)은 그 가치에 비해 천대받으면서 위협받고 있다. 우리 사회의 천박한 인식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던 드라마 “로맨스 타운”에서 부잣집 아들 강태원은 자신의 집 가정부 노순금에게 이렇게 말한다.

“비위도 잘 맞추고 눈치도 잘 보고, 때론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남은 밥 남은 반찬 먹어치워 음식물 쓰레기 안 생기게 하고, 자기 처지 알고 주제 알고 몸 낮춰 빠질 줄도 알고 입 다물 줄 알고.”

표현이 지나치다는 비판을 받은 내용이긴 하지만, 우리 사회의 천박하고 저열한 인식을 생생하게 드러냈다는 지지도 받고 있다. “로맨스 타운”은 그만큼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계급적 차별의식을 담아내려는 시도와 돈 앞에 무너지는 위선적인 인간들의 모습을 잘 드러낸 수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맨스 타운”은 뿌리 깊은 계급적 차별의 지점을 순진한 낭만적 상상으로 뛰어넘으려 한다. 노순금이라는 순수하고 착하고 성실한 캐릭터의 노력으로 식모들 사이의 우정을 되찾고 왕자님(강태원)과의 사랑도 성취한다.

하지만 영화 “헬프”는 "로맨스 타운"의 한계에서 더 나아가서 반갑다. 저항하는 흑인에 대해 무법적인 살인과 테러가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사회, 모든 법질서가 백인에게 유리하고 흑인을 억압하고 있는 사회에서 흑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극히 좁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용기를 낸 가정부들을 중심으로 끌고 왔다. 힐리를 중심으로 하는 상류층 백인 여성들과 스키터 엄마 등이 가진 위선적인 모습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계급적, 성적, 인종적으로 가장 열악하고 인간적 권리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하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을 냄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사회의 모순을 고발한다는 내용은 “로맨스 타운”의 한계를 뛰어넘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잘못된 사회 시스템은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에이블린(흑인 주인공)이 힐리(인종차별주의자)에게 던지는 마지막 절규, “이제 그만하세요. 지겹지도 않으세요.”와 흐느끼는 힐리의 모습은 결국 흑인이든 백인이든 인종 차별의 거대한 벽에 모두 갇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벽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용기를 보여달라는 영화 “헬프”.

영화는 거의 두시간 가까운 분량이지만, 영화 내내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유쾌하고 재미있는 미니와 애절한 아픔을 간직한 에이블린, 상큼발랄한 작가 지망생 스키터가 보여 주는 다양한 재미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미국에서 3주 동안이나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했을 정도였으니 재미라면 걱정하지 말고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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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뜯어먹고 사는 거 아니다.”

어머니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다 큰 아들이 늦은 나이에도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아마도 턱없이 높은 외모에 대한 기준 때문이라고 보셨을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난 내 기준에서 매우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살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아름다움은 꼭 외모만을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하고 같이 살다 보면 자잘한 긴장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다. 남편이란 작자가 금요일 후배들과 새벽까지 술을 먹다가 들어와서는 토요일 온종일 뒹굴뒹굴하며 보내고 일요일마저 집에서 게임만 하고 있으니, 모처럼의 휴일이 맥없이 그냥 가는 게 못내 아쉬웠을까. 아내는 부산스럽게 외출 준비를 했다. 초췌한 내 몰골 때문인지 아니면 나에게 화가 났는지, 나에게 나가자는 말도 안 하고 민서를 데리고 개웅산에 다녀오겠다는 거다. 일단 아내 얼굴에서 노랑 신호등(주의)에 불이 들어왔다는 신호다.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그냥 내보내면 난 죽는다. 금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이틀 내내 비가 내린 터라 나는, "비 온 뒤라 개웅산 온통 진흙길일 거야. 잠깐만 기다려. 민서 자전거 끌고 안양천에 같이 나가자."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아내는 화가 나도, 잘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다가도 시간이 지나고 속으로 삭이면서 풀어낸다. 짜증 내며 징징거리는 민서와 컴퓨터 앞에만 앉아서 게임만 하는 나를 보면서 내심 많이 답답했나 보다. 안양천을 나와 가을의 둔치를 걸어 다니다가 고척교 아래 마련된 메밀밭에서 잠시 쉬는 그의 얼굴에 여유로운 웃음이 떴다. 다 풀어냈구나.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간은 관계를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외모를 보기 위해서는 거울만 있으면 되지만 자신의 마음을 보기 위해서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를 통해서 내 마음의 저 깊은 곳까지 볼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통과해야 할 첫 관문인 것이다.

하지만 타인과 맺는 관계를 자신의 문제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변질시키기도 한다. 이 사람한테는 이래도 되겠지, 이 사람은 이러는 나를 이해할 거야, 하는 마음은 자신의 문제를 상대방에게 떠넘기기 위한 기만이다. 이는 깊은 관계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오래된 인연이 이런 이유로 돌아선다.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제를 떠넘기는 게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똑바로 직시하는 객관적 자아를 형성하는 것에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믿는다. 때로는 끊어질 듯한 긴장감을 형성하는가 하면, 때로는 느슨한 무관심을 지속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끈의 길이는 약간 길었으면 좋겠다. 그 사이에서 바람이 무심히 지나가고 그 바람 사이로 서로의 체취를 맡으며 언제나 그리워할 수 있도록 말이다. 곁에 있어도 네가 보고 싶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런 그리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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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항상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한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새롭게 길이 나면 그곳에서 제를 올렸다. 길은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출구이면서 낯선 것들이 공동체로 들어오는 입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좋은 것들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고 공동체는 밖으로 번창하라는 의미를 제에 담았다.

중앙선의 복선화로 새롭게 자전거길이 뚫렸다. 사실 길이 "새로" 뚫렸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이미 있던 길을 자전거 길로 바꾸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철도 중앙선의 역사는 멀리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만주 침략과 한반도 수탈의 두 가지 목적을 위해 중앙선을 건설했다. 1936년 일제가 밝힌 건설 목적에서는 “반도 제2의 종관선을 형성함으로써 경상북도·충청북도·강원도·경기도 등 4도에 걸치는 오지 연선 일대의 풍부한 광산·농산 및 임산자원의 개발을 돕고, 지방산업의 발달을 촉진하는 동시에 격증하는 일본(日)·조선(鮮)·만주(滿)의 교통 연락, 객·화의 수송 완화를 도모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각주:1]  철마가 달리던 길을 이제는 두 바퀴를 굴리며 달리는 자전거들의 질주로 채웠다. 억압과 착취의 도구였던 길이 놀이와 낭만의 길로 바뀐 것이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하였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는 아마 이런 때에 쓰는 말일 것이다.

용산역에서 6시 45분 용문행 전동차. 맨 앞칸과 뒤칸에는 자전거를 싣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앞칸에만 해도 20여 대의 자전거로 채워졌다. 거기에 레저용 자전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할아버지의 자전거는 짐받이에 마른 풀더미가 있었는데, 할아버지 말로는 약재에 쓰이는 거라서 돈을 많이 받는단다. 지금도 자전거를 싣고 밭에 나갔다가 다시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이 노인 외에도 밭에 나가신다는 중년의 아저씨와 또 다른 노인도 생활 자전거를 전동차에 실었다. 일요일이라 놀러 가는 자전거들이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분들의 자전거는 화려한 자전거들 틈에서도 유난히 돋보였다.

용산에서 출발해 약 1시간 반 만에 양평에 도착했다. 양평역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길을 바로 찾기는 어려웠다. 편의점에 들어가 물어서 겨우 자전거길에 올라갔다. 길은 아주 잘 닦여 있었다. 아스팔트를 덮은 철도 길은 부드러운 페달의 느낌을 다리에 전해주었다. 이제는 기차가 지나지 않아 버려질 뻔했던 능내역은 자전거들의 휴식 공간으로 변했다. 젊은 시절 모꼬지 장소로 대성리 다음으로 자주 찾았던 능내역이 이렇게 변하니 기분이 묘했다. 철도의 레일도 철길을 덮었던 자갈들도 저마다의 독특한 운치를 주었다. 산을 뚫어 만든 9개의 터널도 자전거길의 하나다. 교각은 반반한 나무판자를 깔아놓았다. 판자 위를 달리는 자전거로 달그락거리는 나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다. 이 모든 것들이 한강 자전거 길에서 만날 수 없는 양평 자전거길의 재미다.

반면 급커브길이 많고 언덕길도 많았다. 자전거 초급자나 아동들에게는 쉽지 않아 보인다. 터널 안도 생각보다 어둡다. 안전사고에 유의해야 한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자전거 길 관리가 제대로 이어질지도 걱정이다. 사람이 오가는 자리는 아무리 조심스러워도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관리가 부실하면 금방 망가지기 쉽다. 게다가 자전거 도로는 지역 지자체가 직접 관리할 텐데, 안양천만 해도 동네마다 지자체 사정에 따라 길의 상태가 다르다. 양평이나 남양주의 재정 상태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자전거 도로 관리도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뉴스를 보니 하루 전 팔당댐 인근 양서문화체육공원에서 '남한강 자전거길 길트임 기념식'이 있었다. 여기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4대강(사업)은 강을 주민들에게 돌려주는 사업을 해야겠다고 해서 하는 것"이라며 "소수가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반대한다."고 말하면서 "국민들은 절대 환영"이라고 언급했다.

4대강 사업은 크게 보 사업과 준설 사업, 그리고 강변 주변 사업으로 나누어진다. 따라서 자전거 길도 크게 보면 4대강 사업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양주길 구간은 예전 폐철도를 이용해 마련한 자전거 도로다. 따라서 이 구간은 4대강 사업과 관련성이 없다. 물론 이 길이 나중에 강을 따라 연결되는 전국 자전거 도로망에 포함되므로 그 시작점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4대강 사업을 억지로 녹색 사업으로 포장하기 위한 꼼수다. 많은 자전거 전문가들이 레저로서의 자전거 문화보다 교통수단으로서 도심내 자전거 도로 확보가 더 시급한 녹색 사업임을 지적하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4대강 사업으로 쫓겨난 농민만 2만 4천여 농가에 이른다. 남양주길 한가운데에 있는 두물머리에서는 현장 농민들이 지금도 계속 저항하고 있다. 이곳의 사업 공정률은 0%라고 한다. [각주:2] 이명박 대통령은 항상 그래왔듯이 이곳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농민들과 인권환경단체들은 국민이 아니었다.

프레드 피어스의 '강의 죽음'이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수문학자와 공학자들은 강과 관련된 수많은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결론 내렸다. 흐르는 강물의 위력과 콘크리트가 정면으로 대치하면 언제나 콘크리트가 패배한다. 한 곳에서 홍수를 막으면, 다른 곳에서 더 자주 홍수가 일어난다. 공학자들이 강을 다스리려는 시도는 자연과 함께할 때, 자연의 요구에 순응할 때만 성공을 거둘 수 있다." [각주:3] 멀리 볼 필요도 없이 올여름 많은 비 때문에 한강과 그 지천들, 지방의 많은 하천의 둔치에 만들었던 수많은 구조물과 자전거 도로들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를 본다면 지금 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사업이 얼마나 허울 좋은 껍데기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이번에 새롭게 뚫린 자전거길은 무척 반갑다. 하지만 또한 슬프다. 반갑게 맞아들이고 즐겁게 달려야 할 그 길에 묻어 있는 이 수많은 이야기와 애환들을 언제쯤 세상에서 알아줄까.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길은 길이다. 길을 통해서 기쁨과 즐거움도 들어오지만, 전염병과 전쟁, 폭력들이 들어올 수도 있다. 우리가 지금 만들어놓고 달리는 이 자전거 길이 언제나 평화와 행복을 전해주기를 바라면서도 또 다른 욕심과 욕망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이유다.



















  1. 네이버 지식사전 "중앙선"에서(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61346) [본문으로]
  2. 인권오름-4대강 사업 공정률 0%, 팔당 두물머리를 지키자 [본문으로]
  3. 이정환닷컴-"4대강, 토건국가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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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을 넘기면 자기 얼굴에 살아온 인생이 드러난다는 말이 있더라. 그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나이도 이제 마흔이 낼모레다. 어찌됐건간에 나이와 인생에 얼굴에 드러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좋은 얼굴을 가지고 싶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의 얼굴 표정을 본다. 뽀얀 얼굴에 드러나는 다양한 표정에 매번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게다가 이제는 자아가 생기는 시기라서 그런지 감정을 얼굴에 싣는 것이 점점 다양해지고, 어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나름의 표정 연기도 점점 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어린 아가의 애교라는 게 그런 게다. 억지 울음이나 억지 웃음도 짓는데, 그런 표정을 보고 있자면 웃지 않을 수 없다. 아기야 그것을 어른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보다 자기가 원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한 행위였음에도 우선 어른들에게 웃음을 준다. 아이가 주는 행복 중의 하나다.

민서도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직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해 대화를 통한 자기 표현이 어색해서일까. 그 표정들이 정말 다양하다. 심지어 사진 찍자며 웃어 보라면 억지 웃음까지 짓는다. 그 억지 웃음이라는 게 입만 살짝 벌리고, 눈만 살짝 감은 듯 뜬 듯 한 상태로 있는 표정이라서 어찌나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억지 울음도 그렇다. 원하는 걸 안 들어 주면 억지로 우는 울음을 운다. 소리만 "앵~" 할 뿐 눈물 한방울 나오지 않는다. 입가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소리만 내는 억지 울음도 재미있기는 마찬가지다.

민서 엄마에게는 독특한 버릇 하나가 있는데, 눈이 나쁘다 보니 양미간에 주름을 잡고 힘을 주면서 시선을 주는 것인데, 요새는 이것도 따라해서 걱정이다. 그래서 민서 엄마도 이 버릇을 고치기로 마음 먹고 있다.

강아지 인형이 있는데, 이 강아지 인형이 얼굴은 정면을 향하면서 눈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민서는 이 모습도 따라하는데, 마치 눈을 흘겨보는 것 같은 표정이다. 이 표정이 익숙해져서인지, 언제는 아빠가 좀 장난을 치니까 눈을 흘겨보듯이 쳐다보다가 팽하고 엄마한테 가더라. 순간순간이 놀랍다.

민서가 많이 웃어주길 바란다. 그 웃음의 미학이 얼굴에 항상 깃들어 있어서 행복한 아이가 되기를 바란다. 덕분에 나도 많이 웃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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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내가 좀더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일만 하다가 도살장에 팔려간 말 복서가 생각난다. 사실 이 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 중의 하나다. 때로는 '성실' 때로는 '희생'으로 떠받들어지지만, 사실은 '무기력'의 다른 말일 수도 있고, '대안없음', '출구없음'의 비슷한 말이기도 하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체제와 시스템에 대한 무지는 결국 우리에게 성찰 없는 '희생'과 비판 없는 '성실'만을
요구할 뿐이다. 이런 체제가 바라는 것은 저항 없는 '무기력'의 상태이다.

길가에서 걸인이 굻어죽어도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유죄다. 하물며 생때같은 어린 목숨들이 고작 성적 때문에 제 목숨을 아스팔트 위로 던져버려도 꿈쩍도 안하는 나라에서 사는 우리 모두는 지금 무기력하다.

선거로 사람을 잘 뽑자는 이야기도, 나만 잘 하면 된다는 말도, 결국은 그 무기력 속에서 희망도 출구도 없는 세상을 향한 헛발질에 불구하다. 무지와 무기력은 결국 권력의 타락을 부추기고 방조하는 일이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을 오가는 정치권력이 내온 결과는 처참할 뿐이다. 모든 불행한 일은 언제나 외부의 적(대부분 북한, 때때로 중국) 때문이라며 외치는 보수 언론은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 국민의 충견이 아닌 권력의 충견 노릇을 하는 검경부터, 체제에 순화되어 법의 정의를 고민하기 보다 승진과 권력에 욕심을 부리는 판사들, 빈곤의 그늘을 키우기에 여념없는 부자들, 교육의 숭고한 가치를 버리고 지식 장사에 나선 사학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안주하며 자신의 욕심만 채우고 있는 정치가들. 이 모든 것들이 나와 당신이 만든 그 '성실'과 '희생'이 만든 댓가다.

권력을 탐해 그에 아부하거나 기생하려는 자들이 넘쳐나는 사회는 곧 전체주의 사회이며 파시즘 사회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무지에서 벗어나고 무기력을 깨지 않는다면 공포의 마왕이 하늘에서 내려와 모두를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끔찍한 미래를 막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무잇일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그 해답을 마련해 놓고 있다. 




동물농장(세계문학전집5)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지은이 조지 오웰 (민음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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