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비가 왔다. 비 오는 소리가 좋아 창을 열었다. 차가운 창살이 창 앞에 가지런히 서있다. 지금 당신의 집 창문은 어떤가. 아마도 당신이 도시 생활을 하고 있다면, 특히 서울에 살고 있다면, 아마도 절반 이상은 쇠창살 창문을 보고 있을 것이다. 열린 창으로 보여야 할 푸르른 하늘이 창살로 쪼개져 있을 거다. 우리는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 가늠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외부의 적을 상정하고 우리를 스스로 속박하고 있다. 스스로 눈을 가리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근대 역사에서 결코 함께 설 수 없는 이웃이 되어 버린 두 나라. 영화 는 그 두 나라의 경계에 있는 레몬 농장의 팔레스타인 여인 살마와 그 옆으로 새로 이사온 이스라엘 국방장관 나본과 그의 부인 미라의 이야기다. 셀마의 레..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주목처럼 살아라 - 백두대간 지리산에서 덕유산까지 9박10일의 이야기 9 - 삿갓재대피소 >> 동엽령 >> 송계삼거리 >> 향적봉 >> 무주리조트(약 10.7km) - 2008.07.03. 노을 뒤에 남는 아쉬움들, 연민, 후회, 집착... 털어버리고 싶었던 감정들이 심장 가장 안쪽에서 비를 맞고 있다. 소나기처럼 그냥 지나가다오. 그저 한바탕 비를 맞고 푹 젖어버리면 더이상 비를 피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라면과 햇반으로 아침을 든든하게 했다. 이날 예정된 목적지는 향적봉 대피소. 거기서 하룻밤 더 묵고 다음날 빼재로 내려가 상경한다는 계획이다. 따라서 이날 갈 거리는 짧다. 비는 그쳤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날씨다. 배낭에만 우의를 둘러주었다. 다시 신발끈 꾹 메고..
삿갓재 노을에 기대어 서다 - 백두대간 지리산에서 덕유산까지 9박10일의 이야기 8 - 육십령 >> 할미봉 >> 장수덕유산 >> 남덕유산 >> 삿갓재대피소(11.9km) - 2008.07.02. 아침부터 안개가 심상치 않다. 강수확률은 30%. 비가 올까? 완전히 마른 신발을 신어봤던 게 언제였더라. 수염을 자른 게 언제였더라. 입고 있는 옷도 매일 똑같다. 다행히 매일 세탁을 해서 입지만 물세탁만 한 거라서 냄새도 좀 난다. 머리카락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길게 자라고 있다. 손톱의 때는 양호하다지만 끼고 있는 장갑에서는 퀴퀴한 땀내가 진동을 한다. 행색만 보면 산사람 그대로다. 도시에 나간다면 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을 거다. 이렇게 이틀은 더 가야 한다. 여행이 끝난 뒤 나는 어떤 모습일까. 5시, 식..
촛불집회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 무엇보다 시민들의 위트와 풍자, 해학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전경 여러분, 이미 점호시간이 지났습니다. 지금 바로 해산하시고 숙소로 돌아가서 점호받으세요. 전경 여러분, 여러분이 이런다고 밥 더 주지 않습니다. 휴가, 더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선동당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을 선동하는 저 경찰들을 보세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불법을 행하는 동안, 여러분들을 선동하는 저 경찰관은 얼굴도 보이지 않는 안전한 곳에서 여러분들을 선동하고는 바로 도망가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 선동당하지 마시고 방패를 내려놓으시고 시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여러분의 가족과 형제 자매들입니다. 여러분의 미래의 부인입니다. 전경여러분, 여러분에게 명을 내리는 어청수의 아들은..
산죽길에서 만나는 바람 - 백두대간 지리산에서 덕유산까지 9박10일의 이야기 7 - 중재 >> 백운산 >> 영취산 >> 깃대봉 >> 육십령(19.1km) - 2008.07.01. 꿈도 꾸지 않은 깊은 잠을 잤다. 새벽에 일어나도 상쾌하다. 태생적으로 낯선 곳에서도 잠을 잘 잔다. 산속에서 자고 나면 기분은 늘 좋다. 며칠전까지 내 어깨에는 항상 파스가 붙여져 있었다. 이제는 파스가 없어도 괜찮을 정도로 어깨가 단단해졌다. 무거운 배낭과 몸무게를 지탱했던 무릎과 발목은 신기할 정도로 멀쩡하다. 넘어지고 까지는 일이 없었다. 몸은 이미 자연과 공명하고 있었던 것일까. 6시에 민박집을 나왔다. 짙은 안개가 중재 마을을 살포시 보듬어 안고 있었다. 주인아저씨는 이번에도 차량으로 고갯마루 근처까지 배웅해 주셨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 백두대간 지리산에서 덕유산까지 9박10일의 이야기 6 - 매요리 - 복성이재 - 봉화산 - 중재(21.4km) - 2008.06.30 늘 그래왔듯이, 새벽 4시에 일어났다. 햇반을 준비하면서 점심때 먹을 것까지 데웠다. 햇반은 그냥 먹으면 까칠하지만, 한번 데웠다 먹으면 어떨까. 새로운 시도다. 잘 되면 도시락을 먹는 기분일 것이다. 햇반 하나에 김치로 아침을 떼웠다. 물론 이렇게 출발하면 9시부터 배가 고파온다. 그때부터는 쵸코바나 사탕으로 견디다가 11시 즈음에 점심식사를 한다. 물이 있는 곳이 좋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냥 맨밥을 먹으며 물을 아끼는 수밖에 없다. 지리산과 달리 백두대간에는 종종 물 구하기 어려운 구간이 있다. ▲ 매요마을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6시 할머니께 인사..
길을 잃고 길을 찾다 - 백두대간 지리산에서 덕유산까지 9박10일의 이야기 5 - 고기삼거리 - 여원재 - 매요리(18.2km) - 2008.06.29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전날밤 늦게 잠들었다. 방안에는 빨래와 젖은 물건들을 늘어놓아 한쪽 구석에서 초라하게 잠들었다. 밤새 방바닥은 뜨겁게 달궈졌다. 주인께 방에 불을 넣어달라고 말했기 때문인데, 더워도 젖은 물건들을 말리기 위해서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늦잠을 잤다. 오랜만의 게으름이다. 기상 예보는 오전 중에 날이 갤 것이라고 알려왔다. 휴대전화를 꺼내 전원을 켜보았다. 그러나 응답이 없다. 젖어서 내부기판에 무리가 갔을 수도 있다. 배터리를 분리하고 당분간 휴대전화는 켜지 않기로 했다. 9시에 밖으로 나왔을 때는 가랑비가 좀 내리고 있었..
아름다운 동행, 비바람을 뚫다 - 백두대간 지리산에서 덕유산까지 9박10일의 이야기 4 - 성삼재휴게소 >> 만복대 >> 정령치휴게소 >> 고기삼거리(11.2km) - 2008.06.28 친구 기석은 새벽 2시가 좀 넘은 시간에 찾아왔다. 이번 종주 구간 중 1박 2일 동안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동행없이 가도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구간이라 심심하지 않지만, 이제부터가 외로운 여행이 될 수밖에 없다. 지리산 종주 코스를 벗어나면 이런 장마철에 산을 찾아올 이가 드물기 때문이다. 물론 내면과의 동행이라 여기겠다는 다짐을 했지만, 막상 그것은 험난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혼자 가면 또 누군가를 만나지 않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또 즐거운 일이다. 그런 기대감이 여행을 즐겁게 한다. 그러..
